2012년인가 그 이듬해였나 지구 반대편 미국이라는 나라에 도착한 지 하루째. 안 지 이틀 된 언니가 자신이 내 팔뚝을 비이성적인 악력으로 비틀어쥐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아무리 떨어내려 해도 떨어지지 않는 그 힘의 원천은 분명히 혐오였고, 공포였다. 자신이 혐오하고 무서워한다는 비둘기 앞으로 타인을 디미는 통에 비둘기들은 놀라 푸드덕대며 달아났다. 내 팔을 그러쥐고 등 뒤로 숨은 그는 그 소리를 듣고 내 귀에 대고 비명을 질렀다. 비둘기는 3m쯤 앞에 있었고, 다가간 건 그였다. 나는 그날 이후 비둘기 포비아를 혐오하게 됐다.
전 국민의 사연을 설문조사해보지는 않았지만, 내 주변에서는 다들 엇비슷한 이유를 댄다. 비둘기가 '더러워서' 싫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이들 대부분은 비둘기가 실제 더러운지는 잘 모르고 심지어 접촉을 해본 적도 없다. 그들은 그저 도시의 더러운 바닥에서 날지 않고 먹이를 찾는 비둘기의 모습을 봤거나, 역겨운 토사물을 쪼아 먹는 모습을 봤다거나, 어딘가에 절단돼 발가락이 없거나 발가락이 기괴하게 기형이 된 모습을 봤다거나, 비둘기가 푸드덕대며 날아가는 순간 비둘기에게서 세균 따위가 떨어진다는, 언젠가 미디어에서 접했던 이야기를 기억해 냈다. 그러니까 실제로 비둘기에게 물리거나 쪼이거나 괴롭힘을 당한 건 아니고, 추상적으로 지어낸 상상을 가지고 혐오증이 생겼다는 말이다.
나는 이런 비슷한 혐오의 모습을 초등학생 때에 본 적이 있다.
어떤 아이들이 '저 애에게는 세균이 있어'라며 한 아이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그 아이가 사용하는 책상에 손을 비벼 여자아이들 입술에다 가져다 대는 행위를 반복하면서 여자아이들에게는 '네 입에 세균 묻었다'라고 했다. 유치하고 아주 비겁한 장난이다. 하지만, '세균'이라는 상상 속의 공포 자체는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한 아이를 기피하고 싶은 존재로 만드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다. 어느 누군가가 그만두라 할 때까지 그 아이들은 그런 행위를 반복했다. 따돌림을 당한 아이는 다른 아이들에게 딱히 잘못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괴롭힘을 당했다.
비둘기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고, 그 아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런 혐오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는 말인가.
얼마 전, 남편과 산책을 하다 연두색 울타리와 울타리에 둘러 심어진 나무사이에서 푸드덕대는 비둘기 한 마리를 보았다. 울타리가 높기는 했지만, 비둘기가 반대쪽으로만 돌아 나온다면 나오지 못할 구멍은 없었지만, 비둘기는 끝끝내 직진만 하려고 했다. 보통의 상황이었다면 비둘기도 나름 침착했겠으나 비둘기의 눈앞에는울타리 건너 고양이 한 마리가 매서운 눈으로 비둘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고양이 애호가지만, 동물 애호가이기도 하다.의미 없는 몸부림을 계속하는 그 비둘기가 애처로웠다.
인생 통틀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시도를 결심했다. 비둘기를 붙잡기로 한 것이다.
내가 다가가자 비둘기의 몸짓은 더 다급해졌다. 18인치 모니터 하나 크기의 공간에서 비둘기는 쉴 새 없이 비상을 시도했다. 포슬포슬한 작은 깃털들이 푸드덕하는 소리와 함께 몇 개씩 빠져 날아다녔다. 겁에 질려 이리저리 날갯짓을 하던 비둘기는 지쳐 있었고, 생각보다 쉽게 내 손에 잡혔다. 그 비둘기는 아주 건강한 녀석이었다. 회빛 가슴깃은 가지런히 배 쪽 방향으로 나 있었고, 깃털에서는 윤기가 났다. 이렇게 비교해도 될지 모르겠으나, 백숙용 닭을 손질하려고 잡았을 때처럼 가슴뼈가 살짝 앞쪽으로 돌출된 모양이었다. 일부러 살을 찌운 닭과는 달리 지방층은 느껴지지 않았고 바로 뼈와 가죽이 붙어있는 느낌이었다. 가슴께는 내 두 손이 다 필요할 정도로 컸다. (고양이를 피하려다 사람에게 잡혔으니 오죽하랴마는) 얇은 가슴뼈 그 사이로 이 녀석의 세찬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나도 한 번 안아보고 싶다는 남편에게 건네줘야 할까 하는 찰나, 그 찰나의 방심을 엿본 비둘기는 휘리릭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아니, 푸드더더덕. 비둘기의 삶은 이렇게 애처롭다. 매 순간 고양이의 눈을 피해 날아야 하고, 산과 가까워지면 들짐승의 눈도 피해야 하는데, 이젠 사람의 손까지 피해야 할 처지가 됐다. (나 말이다.)
비둘기는 도시의 삶에 적응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 것뿐이다. 살고 싶어 혹은 목숨이 붙어 있어 날고, 걷고, 쪼아대는 그 모습이 나와 닮아 누군가에게 역겹게 비췄을 테지만, 나는 살아남으려는 그들의 발악을 존중한다. 우리도 살아남기 위해 매일 발악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비둘기는 우리를 미워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처절한 그들의 몸부림을 부디 가엽게 여겨주기를. 실체 없는 공포나 혐오는 멈춰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