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이면 35이다. 35살이라는 나이에 나는 막연한 환상을 품고 살았다. 35이면 나는 10년 차 직장인일 것이었고, (열심히 한다는 가정 하에) 회사에서 인정받으며 살아가는 멋진 커리어우먼으로의 나의 모습을 꿈꿨다.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점심, 저녁으로 술자리에 불려 다녔고, 밤늦게 잠복도 했고, 이런 일상이 계속되다 보니 건강도 안 좋아졌지만 정규직 타이틀도 거머쥐었었다. 그걸로 만족하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큰 일을 겪었다. 6개월을 홀로 버티다 건강을 핑계로 회사를 나왔다. 직전 회사에선 8시-9시 퇴근을 하도 했다. 매일같이 배도 고팠고, 굶을 수 없으니 배고픈 상태로 매일 야식을 먹었다. 1년 새 5kg가 쪘다. 여기저기서 상도 받고 하면서 그것으로 보상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장 쪼가리는 내게 일자리를 보장해주지 않았다. 잘 될 거라는 선배들의 응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루종일 모니터에 업무 말고 다른 것을 켜놓는 사람도 회사를 잘만 다니는데. (물론 회사를 나온 내 탓이 크다.)
30 중반에 하기 아주 이른 이야기이지만, 얼마 전부터 치열하게 살기가 싫어졌다. 치열하게 살아서 내게 미래가 불안한 일자리 하나 외에 대체 무엇이 남았다는 말인가.
일전에 미국에서 일할 때, 회사에 일주일에 한두 번 와서 웹사이트 서버 관리 등을 해주고 가는 프로그래머를 보고, 참 신기한 직업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출근하고 그는 나보다 높은 연봉을 받아갔다. 프리랜서로 고용이 불안정하니, 돈을 더 줘야 한다는 거다. 그 개념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내게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프리랜서 연봉이 훨씬 짜니 말이다. (소수의 유명인을 제외하고 말이다.)
얼마 전 전직을 하면서 내가 그 프리랜서가 됐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몇 달째 밥을 잘 벌어먹고 있다. (사장님이 된 건 아니다.) 월급이 미세하게 적지만, 몰입해야 하는 시간은 똑같거나 적어졌다. (물론 잡일이 많지만.) 회사를 매일 9시까지 출근하지 않아도 되고, 내 일을 잘 마쳐내면, 어느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치열하게 살기 싫어했더니 (그나마 덜) 치열하게 살 방안이 마련된 셈이다.
물론, 매우 부담스럽다. 위에서 책임을 대신 져 줄 과장, 부장, 차장도 없고. 나 스스로가 사장이고, 나 스스로가 직원이다. 내가 챙기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대신 챙겨주지 않는다.
하지만, 내 일정을 스스로 조율할 수 있다는 것 회사원일 때에는 누려보지 못한 기쁨이다. 왜, 병원 한 번 점심시간에 다녀오려고 해도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전전긍긍 다녀오지도 못하는 그러니까 맘 놓고 아파하지도 못하는 설움을 겪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점심시간이 정해져 있지도 않다!)
얼마 전 블라인드에 올라왔던가. 이름 들어봤을 만한 대기업들에서 시행하는 희망퇴직, 명예퇴직을 나열해 놓은 글이 있었다. (본인이야 회사에 20년은 다니마, 하고 있지만 또 회사는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게 분명해진 시대다.) 주변 지인들도 그 살생부에 포함되어 있었다. 회사를 더 다니느냐 마느냐 고민 끝에 나가기로 결정하신 분들도 여럿 있었다. 대기업에 들어가 놓고 10년 차에, 혹은 그전 연차에 결국 사표를 쓴 이들을 보면 대체 왜 내가 회사에 목을 매는지 모를 지경이다. 쯧.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비의 안정적인 개고생 라이프를 즐겼던 나는, 아마 곧 또 어딘가에 9시에 출근하는 사노비로 취직하겠지. 지금도 시간이 넘쳐흘러 전전긍긍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니, 이건 내 업무능력이 출중한 탓에 시간이 남는 것이다.)
오전 10시 한 카드사 설문조사하면 준다는 커피에 꼬여든 800명이 참여 중이다. 다들 일할 시간 아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