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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란도나츠 Nov 01. 2024

강아지와 회복탄력성


우리 집 강아지는 산책 전 가끔 벌이는 혼자만의 의식이 있다. 문 앞에 서성거리며 산책을 가고 싶은 척은 혼자 다 해놓고, '산책 갈까?' 하며 목줄만 잡으면 줄행랑을 치는 것이다. 탁자와 의자 아래를 요리조리 다니며 네 다리를 빠르게 교차하며 움직이는 모습을 뒤쫓아 다니고 있자면, '다른 집 강아지들은 산책에 환장하던데'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나는 지금 계단 앞에서 내려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이놈을 끌어안고 10분째 멍 때리는 중이다. 저만의 의식의 상위버전으로, 목줄은 어찌어찌 (당)했어도 내려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냄새를 맡는 것 같기는 한데) 안겨서 가끔 바르르 떨어대는 모습이, 무섭다는 건가 하는 생각(착각일 것이다.)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 녀석은 겁이 많아서 내게 입양됐다. 강아지를 한 마리 임보하고 싶어서 실행도 한 번 하고(떠나보내며 크나큰 울음대환장파티로 끝났다.) 보호소를 몇 번이나 들락거리다가 만난 녀석이다. 품에 안겨 가만히 있다가 아까 있던 케이지에 내려놓자, 방황하던 눈동자. 겁먹은 그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냉큼 평생 책임지겠다며 데려온 것이 7.5kg의 늠름한 성견으로 자라났다.(그런 녀석을 품에 안고 있는 지금 팔다리가 살짝씩 저린다.)


겁 많은 강아지는 생각보다 쓸 데가 많다. 겁 많은 인간에게 산책 시간을 보장해 주는 것이 가장 큰 쓰임이다. 수상한 아저씨를 보면 으르렁하고, 지나치게 다가오면 왕왕 짖기도 한다. (아저씨들이 처음 보는 강아지를 만지려다 벌어지는 일이다. 다행인 건 강아지 관련 교육프로가 많이 생기고, 반려 인구가 많아지다 보니 겁 많은 강아지의 특성을 이해하는 분도 많다. 으르르 폼이라도 잡을라치면 "너, 겁쟁이구나"하고 한발 빼는 분들이 대다수다.) 혼자서는 걷기 꺼려졌던 밤 산책길도 두렵지 않아 진 덕분에 거의 매일 6 천보는 달성할 수 있다.


강아지를 키우면, 집안 어디에 있어도 혼자인 기분이 들지 않는다. 실제로 혼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정말 졸릴 때를 제외하곤 옆을 따라다니며 놀아달라 보채거나, 먹을 걸 나눠달라고 보챈다. 강아지란 생물은 맛있는 과일과 맛없는 과일을 기가 막히게 구분해 내기 때문에, 맛있는 부위를 골라 바치지 않으면 입에 넣고 오물거리다가 뱉든가, 킁킁대다가 고개를 돌려버리기 일쑤다. (거절당한 그 과일 나머지를 먹다 보면, 맛없는 과일을 먹는 내가 초라해지기도 한다.) 강아지보다 고등생물이지만 체력만은 하등 한 나는, 강아지와 노는 게 체력전이라는 걸 일찍이 알아차렸다. 특히 우리 집 강아지는 터그놀이를 좋아하는데, 이가 부러질 것 같이 놀아줘야 그제야 만족을 한다. 이를 달랠 수 있는 건 노즈워크뿐이다. 간식을 장난감 안에 쏙쏙 박아놓고 나는 잠시잠깐의 휴식을 즐기는 것이다. (하도 잘 찾는 통에 우리 강아지는 늘 하드모드를 강제선택한다.)


강아지가 슬픔을 이해하고 어쩌고 하는 영상이나 글들이 많던데, 우리 강아지는 그런 건 모르는 것 같다. 하지만, 해맑은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걱정이라든가 근심이라든가 이런 건 제쳐두고 현재의 해야 할 일(대부분 산책이다)에 집중하게 되기 마련이다. 사실 무진장 좋은 일이다.


심리상담가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건데, 나는 지지난해에야 처음으로 노을 진 석양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그 석양을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됐다. 현재에 있되, 정신머리는 현재에 있지 않기 때문에 벌어졌던 일이다. 눈앞에 펼쳐진 찰나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과거에 대한 후회 때문에 늘 잊히게 마련이었고, 그 아름다움과 즐거움도 늘 살짝 빛바랜 모습으로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아주 건강하지 못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게 되자, 의식적으로 현재에 집중할 힘이 생겼다. 넋을 잃고 쳐다볼 대상이 생겼고, '카르페디엠' 따위의 말을 실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늘 그랬던 건 아니다.)


강아지는 그런데, 4-5살 아이와 지능이 비슷하거나 아니면 좀 더 어린 상태로 평생을 살아서, 미래에 대한 번뇌에 빠져있거나, 과거에 대한 후회에 빠져있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좋은 것(에 머무르고), 현재 나쁜 것에 (빠져나오는 데) 집중하며 살 수 있다고. 웬만한 사람보다 심리학적으로는 늘 우월한 상태인 거다. 그래서 회복탄력성이 아주 좋다. 아마, 학대당했던 강아지가 좋은 주인을 만나거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면 금세 우리가 아는 '강아지'의 모습을 되찾는 이유일 것이다.


사실, 우리 강아지도 어미와 산에서 잘 살다가 낯선 곳, 보호소에 새끼들끼리만 끌려온 아픈 기억이 있다. 내가 본모습은 아마 무서워서 떨고 있는 그때의 표정과 감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입양 첫날부터 우리 집에 와서 멍빨을 당한 뒤 먹을 것도 안 가리고 잘 먹고, 푸지게 잠도 잔 것을 보면 강아지의 회복탄력성은 정말, 사람인 내가 열심히 배워야 할 능력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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