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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 Nov 11. 2019

알래스카, 다시 겨울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쯤, 그러니까 알래스카로 오기 5년 전쯤, 미시간에서 신랑 정또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졸업 후 주어지는 opt라는 1년간의 취업 준비 기간이 끝나도록 직업을 찾지 못하면 무조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서 한참 불안하던 시기의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는데, 널따란 창밖에, 세상 한가득 눈 덮인 거대한 침엽수의 설경이 보였고, 물에서 올라오듯 허억 숨을 들이마시며 깨어난 적이 있다.


놀란 건 아닌데 뭔가 압도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미시간도 눈깨나 오는 곳이고, 종은 좀 다르지만 거기서나 한국에서나 눈 덮인 소나무를 못 본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꿈에서 본 곳은 뭔가 다른, ‘겨울 나라’라는 느낌이 드는 곳이었달까.

그리고, 그 당시의 나의, 세상 구경 5년 차의 단편적인 상상력으로는 문득 떠오르는 장소 이름이란 것이

‘알래스카’였다.


당시 우리가 도로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도상 알래스카로 차를 몰고 가기는 힘들 것 같다는 단순한 생각에 정또에게, ‘우리가 알래스카 같은데 한 번 가 볼 일이 있을까’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꿈에서 본 설경도 아직 생생하고 말이다.


말해두고 싶은 건, 나는, 사주는 물론, 별자리, 혈액형, 띠의 특징과 함께 예지몽이라 것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루뭉술한 것을 말해서 다들 자기 얘기라고 생각하게 하는 Barnum effect 바넘 효과라는 것도 있고, 말투나 표정으로 대충 상대방이 원하는 바를 잘 해석해서, 듣고 싶은 얘기를 들려주는 이른바 intuition 직관이라는 게 발달한 사람이 있는 거지, 적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물리학적 조건으로는 미래를 알 방법은 없다고 믿는 쪽이다.

마찬가지로, 꿈은 뇌에서의 낮 동안 모은 정보의 정리/처리 프로그램일 뿐으로, 혹시 예지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자기도 모르게 어떤 정보를 이미 알고 있었던가,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얼핏 지나갔던 누군가의 말투라든가, 헤어지고 난 다음에야 영 찜찜한 느낌이 남는다든가 했던 것이 꿈으로 녹아들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래서 이 ‘알래스카 꿈’은 더 흥미롭다. 당시엔 나도 잘 모르는 곳이라서 정말 생각해 본 적도, 따로 생각해 볼 이유도 없던 곳이었기 때문에.(당시 노스 다코타는 꼴에 가기 싫은 주 중의 하나여서 ‘안되면 노스 다코타’라도 가지,라고 말했다가 진짜로 가게 된 것도 쌤통우연이다)


겨울에 왔으면 꿈에서 본 설경을 바로 비교해 볼 수도 있었으련만 여름에 녹음이 우거졌을 때 와서 그러지도 못했고, 막상 눈이 내리기 시작할 때 즈음에는, 늘 그렇듯이 새로운 곳에 적응하느라고 정신없이 첫 겨울이 지나가버려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지금 내 자리 창 밖에는 겨울마다 눈을 덮어쓰는 거대한 가문비나무들이 있긴 하지만.


가끔 눈이 많이 쌓인 날이면 나무들에게 묻는다, 너였니? 아니면 혹시 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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