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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속이기 쉬운 건, 나!

착한 아이 콤플렉스

by 석은별

"내가 엄마를 따라갔다면 오히려 삶이 더 엉망이었을지도 몰라!"


은연중에 내뱉은 말이다.

그렇게 믿어야 나의 상처나 트라우마를 견디는 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를 따라갔다면 오히려 어떤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일 대신 다른 끔찍한 일이 당연히 일어날 것이라는 것...

그건 나를 속이기 위한 셀프 가스라이팅이 아닐까?




저는 괜찮아요.

저는 좋아요.

뭐든 잘 먹어요.

가리는 거 없어요.

이것도 재미있어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대 이상인걸요?

너무 애쓰셨겠어요.

신경 안 쓰셔도 되는데 뭘 이렇게까지...




예의 바르게 응대하는 내 모습을 보면 친절이 DNA에서부터 박혀서 태어난 사람 같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때문인지 서비스직이든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 두려움이나 스트레스를 겪기보다는 나름 즐기는 태도도 보인다. 할머니 손에 자라면서 어른에 대한 익숙함 때문인지 나보다 나이 든 사람들 틈에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편하다. 덕분에 동료들이 부담스러워하거나 슬금슬금 피하는 방문객이 와도 성큼 다가가 환영한다. 그렇게 내가 먼저 나서야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서비스직이 100 에너지 중에 80~90의 에너지를 써야만 한다면 나는 30~40 정도만 써도 남들의 80 수준의 에너지를 쓰는 만큼 티가 난다. 그러니 남겨 둔 에너지로 다른 일에서 헤맨다. 예를 들어 숫자를 정확하게 봐야 된다거나 오타를 최종 확인해서 넘겨야 되는데 미처 발견하지 못해서 인쇄 직전까지 전전긍긍 한다거나, 주어와 서술어를 제대로 짝짓지 못한 비문을 걸러내지 못해 '왜 검토 안 했어요!'라는 날카로운 원망을 들어야 한다거나...


사람마다 잘 맞는 일이 있고, 잘 맞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누구나 많이 하면 다 잘 맞을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마치 내게 사람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것처럼 느끼는 배경에는 늘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생활했다는 기억이 나를 그렇게 속여 놓았기 때문이다.




하루는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서 혼자 덩그러니 남은 일을 정리한 적이 있다.

하나 둘 사람들이 퇴근할 때면 유쾌한 목소리로 그들을 배웅했고, 엘베 소리가 나서 그들이 사라지면 느껴지는 적막함. 사람에게서 느껴지던 그 진동이 사라지는 허전함. 고요함.


사무실이 이렇게도 조용할 수 있다니!

내 컴퓨터에서 팬 돌아가는 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메운다.


컴퓨터를 끄니 천장에서 전류의 소리마저 들리는 기분이다.


'이랬구나. 여기가 사람이 없고 기계를 다 끄면 남는 소리가 저런 소리구나. 불도 끄면 어떤 소리가 날까?'


휴대폰에서 플래시를 켜고 사무실 불도 꺼봤다.


'탁!'


저 아래층 유리문이 바람에 덜렁이는 소리가 들린다. 쌩하니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도 들린다. 사무실 불을 끈다고 해서 캄캄해지진 않았다. 자리마다 있는 시계도 보이고 달빛에 오히려 사무실은 은은하게 보였다. 어쩐지 이대로 나가자니 아쉽다. 의자에 앉아 괜히 좌우로 의자를 빙글빙글 돌려본다.


지금 나타난 이 모습은 직장인의 내가 아니다.

마치 우리 아이들이 내 사무실에 놀러 와서 호기심 있게 여기저기 둘러보듯 나 역시 낯선 밤의 사무실을 둘러보며 구경한다.


'밤은 이렇구나. 이렇게 조용하고 고요하구나.'




그 밤의 경험이 없었다면, 그날의 구경하던 내가 사무실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는 일하는 내 모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저 익숙해서 자동적으로 나왔을 뿐이지

내가 좋아하는 건 적적하다 싶을 정도의 고요한 상태였다.


종종 낮에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언젠가 이 시끌벅적한 곳에 생명체라고는 나 하나뿐이던 그 순간을 떠올려 본다. 어딘지 모르게 충전되던 그 순간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나는 후회가 깊은 아이였다. 나는 죄책감도 많은 아이였다. 나는 슬픔도, 아픔도, 두려움도 큰 아이였다.

그러나 아닌 척, 괜찮은 척, 고마운 척 받아들이면서 장착된 '친화력'으로 10대~30대까지 보냈다.

'어차피 아무도 안 도와줄 거니까!'라는 이유로 '난 괜찮아!'의 가면을 벗지 않았다.

그 가면을 고스란히 닮은 딸을 발견한 어느 날 '괜찮지 않다고!'를 외치는 목소리를 들었다.


괜찮긴 뭘 괜찮아. 개뿔.

불만투성이에, 씩씩대고, 싸우고 싶고,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나를 본 것이다.


너! 왜 자꾸 너 자신을 속여?

뭐가 괜찮아? 서운하잖아. 억울하잖아.

뭐가 좋아? 네가 싫어하는 거잖아!

뭘 잘 먹어? 물컹한 거 못 먹잖아.

뭐가 가리는 게 없어? 털 달린 과일 알레르기 있잖아.

재밌긴 개뿔... 지루한 거 억지로 참았잖아.

수고해 보여? 네가 한 거 반에 반도 못 한걸?

감사해? 마무리도 다 안 한 사람한테 진짜 감사해?

기대 이상이라니. 하루 만에 해도 이 정도는 하겠다!

애써 보여? 대충 여기저기 짜깁기해서 보낸 거잖아.

누가 널 신경 써! 네가 너 좀 신경 써!


가면에 속아서 어깨 뭉치고, 눈 벌겋게 충혈되고, 소화 불량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계속 부어가는 네 몸을 좀 보라고.


넌 너를 너무 속이고 있어.


익숙해서 남들보다 잘하는 것일 뿐...

너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너는 사람들의 비위 맞추는 걸 괴로워해.

너는 남들이 한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

네가 다 하고 싶은 거잖아.

남의 하소연이 듣기 싫은 거잖아.

남이 투덜댈까 봐 미리 숨는 거잖아.




잘한다고 해서 익숙하다고 해서 그게 좋아하는 거라고 착각하지 마.

그냥 태양이 뜬 곳을 향해 고개 내밀고 고개를 돌리는 해바라기 같이 본능처럼 했던 거지.


어쩌면 해바라기는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듯 춤추는 걸 더 즐겼는지 몰라.




엄마를 따라갔으면 인생이 더 괴로웠을 거라는 건 고모가 심어준 씨앗이었다.

그 씨앗을 내내 품고서 나는 더 끔찍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아이라는 굴레 안에서 자랐다.

엄마를 따라갔으면 인생이 더 괴로웠을지,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춤추는 해바라기처럼 살았을지 알 게 뭐야.


오늘 빼낸 씨앗!

씨앗을 심은 건 고모였지만.

키운 건 나였다.

이젠 예쁘게 가지치기해서 적당한 자리에 놓아준다.

어쨌거나 그 세월을 살아 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상상 속의 바람에 흔들리는 해바라기는 지금부터 내가 되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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