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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먼저 말해 준 하루

by 석은별

꿈이라는 건 언제나 나를 불쑥 데려간다. 예고도 없이, 설명도 없이. 어젯밤도 그랬다.




꿈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나는 높은 산 정상에 올라와 있었다. 누가 데려다준 것도 아니고, 내가 올라가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 자리에 있었던 거다. 마치 인생이 어느 지점까지 나를 데려다 놓는 것처럼.


산 위에는 케이블카와 곤돌라가 있었다. 케이블카는 오르기 편했지만, 문제는 내려오는 방법이었다. 곤돌라가 좀 이상했다. 의자도 없이 팔 힘으로만 매달려서 내려와야 했다.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아, 나 팔 힘 약한데." 걱정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덜컥거리는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는데,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오는 어떤 지인이 눈에 띄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인데, 그녀의 첫마디가 이랬다.

"여기 올 거면 운동복이라도 입고 오지. 그 차림 뭐야, 빈티 나게."


그 말이 어찌나 낯 뜨겁고 부끄럽던지.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산 정상에 오르겠다고 작정한 것도 아니었는데 오랜만에 보고 들은 게 빈티라니!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지만, 꿈속의 나는 꾹 참고 있었다. 억울함과 당혹스러움을 꾹꾹 눌러가며 곤돌라를 타고, 팔에 힘을 주며, 그렇게 조심스럽게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초록 잔디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 순간,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냥 차 한잔 마시러 따라온 줄 알았는데, 이런 곳인 줄 누가 알았어. 준비 안 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아까 그 샘, 진짜 얄밉네."



꿈에서 깨어났을 땐 그저 이상한 꿈이라며 웃어넘겼다. 하지만 그날, 서울에 딸을 만나러 가는 길에 그 꿈이 다시 떠올랐다. 편하게 입고 가려다 꿈을 의식해서 평소 입던 오피스룩으로 나섰다. 이너 하나에 홑겹 재킷. 그런데 서울은, 엄청 추웠다. 깜짝 놀랄 만큼! 어떤 사람들은 롱패딩까지 꺼내 입고 있었고, 나는 오들오들 떨면서 딸을 만났다. 순간, 머리를 스쳤다.


"이거, 그 꿈이었네. 예지몽."


산에 올라갈 줄 모르고 따라간 것처럼, 나는 오늘 서울의 날씨를 예측하지 못한 채 올라왔다. 빈티 난다는 말에 마음이 움츠러든 것도, 현실 속에서 가벼운 복장으로 추위에 떨면서 몸으로 다시 겪고 있었다. 사소한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렇게 생생하게 현실과 겹쳐질 줄이야.

나는 아직 꿈을 다 읽을 줄 모른다. 아직 많이 서툴다. 꿈이 내게 건네는 힌트를 미처 다 해독하지 못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아, 그런 의미였구나" 하고 깨닫는다. 하지만 그조차도 나다운 것 같다. 느리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꿈의 언어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


그때 나현이 떠올랐다. 나현은 나의 부캐다. 아주 이성적이고 냉철하며 꼼꼼하고 결단력도 좋다. 얼마 전 분석에서 앞으로 나현 없이도 잘 살겠다고, 내 방식대로 해보겠다고 좀 거리를 둔 상태였다. 내 속에서 나를 괴롭히는 나현과 멀어지고 싶었다. 그만큼 나는 자유롭고 싶었고, 감정에 솔직하고 싶었다. 계산보다 직관을 따르고 싶었고, 때로는 망가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꿈 앞에서, 나현이 그리워졌다. 나현이라면 어땠을까. 날씨를 미리 체크했을 거고, 서울과 대구의 기온 차이를 계산해서 옷차림을 달리했겠지. 나현은 그런 인격체다. 나를 보호하고, 예상하고, 실수를 줄여주는 부캐.


꿈이 예지몽임을 알아차리자 나현을 그리워한다는 건, 나 자신을 이해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나현을 너무 앞세우면 숨 막히지만, 완전히 떼어내면 불안해진다. 아마 나는, 나현과 조금 더 건강하게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다. 지금처럼.




꿈은, 내가 그 연습을 하도록 매일 밤 무의식의 무대에서 시나리오를 펼쳐 보여준다. 나를 몰래 데려다 놓은 산 정상도, 어색한 복장으로 서 있던 그 자리가 낯설지 않다. 왜냐면 현실에서도 나는 그런 자리에 자주 서 있으니까. 다만 이제는, 그 자리를 꿈으로 먼저 만나보고, 현실에서 조금은 덜 당황하는 연습을 하고 있는 거다.


꿈은, 나를 무의식으로 데려가는 힘이 있다. 그건 어쩌면 예지의 힘이 아니라, 내가 나를 더 잘 알아가는 힘일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꿈이 나에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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