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 '큰' 일도 없었다. 아침엔 평소처럼 눈을 떴고, 아이는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질끈 묶은 채 학교에 갔다. 남편은 묵직한 발걸음으로 현관을 나섰고, 나는 정리되지 않은 거실과 반쯤 먹다 남은 커피를 바라봤다. 창밖에는 봄 햇살이 고요하게 퍼지고 있었다. 모든 게 평범했고, 모든 게 지나쳤다.
그런데 갑자기, 울컥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언가가 고장 난 것처럼, 마음 안쪽에서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고, 나는 얼떨결에 입을 막았다. ‘왜 울지?’ 하고 스스로에게 물으면서도, 그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쌓인 것이 있었다. 아니, 쌓인 줄도 몰랐던 것이 터진 것이다.
어제저녁, 남편은 내 요리에 딱 한마디 했다.
“다음엔 덜 짜게 해줘.”
그 말이 머릿속에 잔잔하게 남아 있었다.
아들은 어김없이 “나 배불러” 하고 숟가락을 놨다. 내 마음은 허전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정도 일로 속상하면 안 되지.’ 하고 넘겼다. 그리고 넘긴 채로 하루를 보냈고, 또 하루를 넘겼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감정이 나를 밀쳐냈다.
감정은 신호다.
그날의 울컥함은, ‘지금 여기가 네 감정의 출구야’라고 알려주는 싸인이었다.
마치 오래된 배수구처럼, 정체된 마음이 쾅 하고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돌본다고 생각했다.
명상도 하고, 감정 일기도 썼고, 감정의 언어에 민감한 편이었다. 상담사로서 다른 사람의 감정엔 귀신같이 반응하면서, 내 감정에는 둔감했다는 걸 그 순간 알았다.
‘나도 나를 몰랐구나.’
울컥함은 내가 나를 무시하고 살아온 방식에 대한 항의였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섭섭한 일이 있었다면, '그 사람의 사정이 있었겠지' 하고 넘겼고, 내 감정을 들여다보는 일은 늘 가장 마지막 순서였다.
가족 모두가 편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내가 조금 덜 편하면 그게 사랑이라 믿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내 마음이 언제 찢어졌는지도 모르고 살아온 것 같다.
울컥함이 지나간 자리엔,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커피 잔을 들고 창문 앞에 섰다. 거리의 사람들은 제각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나는 그 속도에서 한 발짝 비켜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울컥함 이후에는 살짝 후련한 마음이 남았다. 감정이 지나간 자리는 비워졌고, 그 틈으로 새로운 숨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감정을 무시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그게 이렇게 중요한 일이었나.
울지 않으려는 나와 울고 싶어 하는 내가 싸우던 그 순간에, 나는 드디어 내 감정에게 ‘괜찮아, 울어도 돼’라고 말해준 셈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울컥함은 나를 지키는 본능이었다.
조용히 침잠해 있던 내면의 아이가 "나 여기 있어"라고 외친 것이다.
그 아이의 손을 잡아준 건, 다름 아닌 지금의 나였다.
나는 이제 울컥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건 약함이 아니라 정직함의 발화니까.
감정이 나를 부른다면, 나는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로 했다. 그래야 나를 조금 더 알아갈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게, 나를 사랑하는 연습의 시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