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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따라 커피가 쓰게 느껴졌던 이유

by 석은별

늘 마시던 커피였다.
물 온도도, 원두도, 비율도 변한 게 없었다.
아침 햇살이 부엌을 가로지르던 익숙한 풍경 속에서, 커피는 늘 하던 그 자리에서 김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한 모금을 삼키자마자 입 안에 씁쓸함이 돌았다.

맛이 아니라 느낌이 썼다.
혀끝이 아니라 마음이 쓴 거였다.

나는 커피를 내려놓고, 컵을 가만히 바라봤다.
'왜 쓰게 느껴졌지?'
그 질문은 마치 돌멩이처럼 마음속에 툭, 떨어졌다.
그리고 그 잔잔한 파문을 따라가다 보니, 내 안의 감정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전날 밤, 남편과 나는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했다.
정확히는, 말을 하지 않는 싸움이었다.

“괜찮아.”
“아니야, 됐어.”
그 짧은 말 사이에 가득한 침묵이 있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알고 있었지만, 말하는 게 귀찮았고 또 말해봤자 뭐가 바뀔까 싶었다.

나는 그렇게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내 마음은 그걸 '버려졌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땐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설거지를 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아이를 등교시키고, 부엌 창을 열었다.
하루의 루틴이 감정을 밀어내듯 쓸고 지나갔다.
그런데 그 커피 한 모금이, 마치 감정의 문을 다시 열어젖혔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작은 감정을 느끼고, 동시에 무시한다.
조금 섭섭했지만 그럴 수 있다며 넘기고, 속상했지만 말하면 분위기만 나빠질까봐 삼키고,
기운 빠졌지만 이 정도는 견딜 수 있다며 버틴다.

감정은 그렇게 쌓이고, 굳는다.
그리고 그 굳은 감정은 아주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를 찾아온다.
커피 맛처럼, 문득 찾아와 나를 멈추게 만든다.

그날의 커피는 내 감정의 온도였다.
씁쓸하다는 건, 마음 어딘가가 상처받았다는 신호였다.


사실 나는 ‘쓴맛’이라는 감정에 익숙한 사람이다.
누군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늘 조심했고,
갈등을 피하려고 먼저 이해하고 참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래서 웬만한 일엔 화를 내지 않았고,
속상해도 금세 괜찮아지려고 애썼다.
그게 성숙함이라고, 어른스러움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성숙한 척하며 지나쳐온 감정들이
내 무의식 속에 쌓이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커피 한 모금에 섞여 나왔다.
‘이건 네가 모른 척한 마음이야.’ 라고 조용히 말하듯이.


나는 커피를 다시 데우지 않았다.
그날은 그냥 그 쓴맛을 그대로 삼켰다.
입 안에 남은 씁쓸함을 다 털어버리지 않고, 조금은 남겨두었다.

왜냐하면 그 맛을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무시하고 지나친 마음, 내가 놓치고 있었던 감정,
그 감정이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는 걸 잊지 않기 위해서.



감정은 이렇게 말이 된다.
어떤 날의 쓴 커피처럼, 아무렇지 않은 순간에도 마음의 진실을 드러낸다.

나는 이제 커피가 쓰게 느껴지는 날, '입맛'보다 '마음'을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그 감정은 나에게 무엇을 말하려는지,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너무 오래 참고 있었는지를 조용히 물어보기로 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괜찮은 척'에 능숙해졌다.
그래야 더 나은 사람처럼 보이고, 덜 민감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괜찮지 않음’을 인정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나 자신에게 정직해질 수 있는 것 같다.


그날 커피가 쓰게 느껴졌던 이유는, 내 마음이 나에게 보낸 첫 번째 경고장이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나를 몰랐던 날’의 또 다른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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