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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내가 참 많이 참아왔구나

by 석은별

참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는 걸, 어느 날 문득 알았다.

그날도 평소처럼 조용히 하루를 흘려보내고 있었는데, 싱크대 앞에서 수세미를 짜다가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이상하게도 눈물이 핑 돌았다.

누가 내 마음을 세게 건드린 것도 아니었고, 무슨 큰 상처가 막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냥... 갑자기. 갑자기 그동안 참았던 감정들이 목 끝까지 차오른 것 같았다.




'나는 괜찮아'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해왔던가.
진짜 괜찮아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걱정할까 봐, 분위기가 흐트러질까 봐, 어쩌면 나 자신조차 감정을 드러낼 줄 몰라서.그냥 조금만 참고 넘어가면 금방 잊힐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말해봤자 어차피 달라질 게 없을 거라고, 그냥 참고 견디는 게 성숙한 거라고.그렇게 참고 넘긴 일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어릴 때부터였던 것 같다.
누구보다 눈치가 빨랐고, 분위기를 재빠르게 감지했다.
새엄마나 고모가 무거운 눈빛을 하면 나는 말을 아꼈고, 누군가 화를 내면 나 때문인것 같아 먼저 사과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감정을 참는 게 ‘사랑받는 아이’의 방식이라고 믿게 된 게.


성인이 되고 나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친구와 다툼이 있어도 내가 먼저 무마했다. 아니, 이해한다고 했다.
연인에게 서운해도 “아냐, 내가 좀 예민했어”라고 했다.
가족과의 갈등 앞에서도 결국 “그래, 내가 참자” 하고 돌아섰다.

나는 나를 참는 방식으로 사랑받으려 했다.
괜찮은 사람, 너그러워 보이는 사람, 미성숙하지 않은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나를 너무 많이 꾹꾹 눌렀다.


참는다고 해서 감정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건 마음속 어딘가에 고이고, 시간이 지나면 곰팡이처럼 번진다.

갑자기 어떤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예상 못한 상황에서 화가 치밀고, 작은 일에도 자책하고, 아무 일도 없는데 무기력해지고...

그건 내가 감정을 잘 다루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감정을 너무 오랫동안 감춰온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남편이 무심코 던진 한 마디에 나는 이상하리만치 상처를 받았다.

“그냥 좀 넘겨. 왜 그렇게 다 마음에 담아?”
그 말이 너무 익숙한 말이었기 때문에 더 아팠다.

그래. 나는 늘 넘겼다.
늘 마음에 담아두지 말자고, 이해하자고, 참자고, 참으면 지나간다고.

그런데 이제는 알아버렸다.

참은 감정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쌓여 나를 집어삼킨다는 걸.


요즘은 조금씩 연습 중이다.
참기 전에 내 마음을 먼저 살펴보는 것.
“지금, 나 이 말 듣고 서운했어.”
“이건 좀 속상했어.”
“내가 무시당한 것 같아서 아팠어.”

이렇게 감정을 그대로 말하는 게 처음엔 낯설고, 손발이 오글거리고,

‘내가 너무 유난인가?’ 싶은 마음도 들지만, 이상하게도 말하고 나면 숨통이 트인다.

나조차 몰랐던 감정이 ‘그걸 이제야 말해주네’ 하며 조금씩 풀려나가는 기분이다.


나는 지금도 완벽하게 말하지 못한다.

아직도 많은 순간을 참고 넘긴다.
누군가의 말에 씁쓸했어도, 그냥 고개 끄덕이며 ‘응’ 하고 넘길 때도 많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건, 이젠 그걸 알아차릴 수 있게 됐다는 것.

‘아, 나 지금 참았다.’
‘이건 좀 억울했는데 그냥 삼켰구나.’

그걸 알아차리는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나를 속이지 않는다.

나는 참는 사람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내 습관이고, 내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참음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지 않게 하기로 했다.

가끔은 울컥할 수도 있고, 때론 예민해질 수도 있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내가 나에게 허락해주기로 했다.

그렇게 말해주니 가슴이 조금 가벼워졌다.




이제야 숨이 좀 쉬어지는 것 같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모든 걸 다 참는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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