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나는 조용히 싱크대 앞에 섰다.
식탁은 정리되지 않은 채였고, 식기들은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된장찌개의 국물 얼룩이 묻은 그릇들, 남은 반찬통, 밥풀 자국이 마른 숟가락.
평소 같으면 ‘내가 또 치워야 해?’ 하는 묘한 짜증이 일었을 텐데, 그날은 묘하게 아무 감정도 일지 않았다.
그냥, 해야 할 일처럼 느껴졌다.
수돗물을 틀었다.
따뜻한 물이 손등을 감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릇을 하나하나 닦기 시작했다.손에 잡히는 그릇의 온도, 미끄러운 거품,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온 세상이 이 작은 공간, 내 두 손 안으로 모이는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접시를 문질렀다. 조용히, 바로 조금 전까지 거기에 남아 있던 ‘맛없었던 저녁’의 흔적을 닦아냈다.신기했다.국물 맛을 탓하지 않고, 조리 과정의 서툼을 책망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닦고 있다는 게.
나는 내가 만든 음식을 닦아내고 있었고, 사실은 오늘 하루를 조심스레 닦아내고 있었다.
거품이 빠진 접시를 헹구면서 나는 생각했다.
‘오늘은 그냥 이걸로 충분해.’
맛이 없었던 것도, 기운이 없었던 것도, 마음이 조금 어지러웠던 것도.
그 모든 게 잘못이 아니라 그저 하루를 살아낸 흔적일 뿐이었다.
수세미를 헹구고, 주방을 닦았다.
조용한 싱크대 옆에서 남편이 슬쩍 다가와 말했다.
"내가 할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괜찮아. 오늘은 내가 그냥 하고 싶어."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그 작은 순간에도, 나는 알았다.
내가 남을 위해 참고 있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이 시간을 정리하고 있다는 걸.
마지막으로 프라이팬을 들었다.
며칠 전 새로 산 팬이었다. 코팅이 반짝였고, 표면이 매끈했다.
나는 그 팬을 조심스럽게 씻었다.
뜨거운 물을 쓰지 않고, 수세미로 살살 문질렀다.
그 팬에는 아직 상처가 없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내 안에도, 오늘 하루에는 새로 생긴 상처가 없다는 걸.
나는 참 많은 날들을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살아왔다.
‘이 정도는 해야지.’
‘왜 이것밖에 못했어.’
‘더 잘할 수 있었잖아.’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배워간다.
살아낸 하루를 무언가로 증명할 필요는 없다는 걸.
그냥,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는 걸.
모든 설거지를 마치고,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주방등 아래서 물기가 반짝이는 그릇들이 조용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싱크대는 깨끗했고, 마음도 이상할 만큼 가벼웠다.
"잘했다." 나는 소리 없이 스스로에게 말했다.
진심이었다.
요즘 나는 안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해낸 사소한 일들을 내가 스스로 알아봐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오늘의 설거지는 단순히 그릇을 닦는 일이 아니었다.
나를 다정하게 정리하고, 내 마음을 조용히 품어주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