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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은별 Feb 07. 2024

왜 엄마랑 같이 살지 않았어요?

책임진다는 것

아이가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던 중에 뭔가 이상한 부분이 있는지 '그런데 왜 엄마랑 같이 살지 않았어요?'라고 묻는다. 복잡한 가정사를 이야기 듣던 중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이 보였나 보다.


나에게는 낳아 준 엄마와 길러 준 엄마인 할머니, 내 동생들을 낳아 준 엄마인 새엄마가 있다. 친엄마는 내가 태어나고 백일쯔음 아빠와 헤어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내가 임신하고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충분히 수긍할만했다. 그리고 엄마의 결심이 쉽지 않았을 것임을 이해하면서도 내 삶을 생각하면 '그래도 좀 참지...'라는 생각도 했다. 전적으로 내 입장만 생각한 바람이다. 그러나 한 여자의 삶으로 보면 갓 낳은 새끼를 두고 나가야 될 정도의 결심이 오죽하겠나 싶은 공감도 일어난다. 물론 어려서는 이해는커녕 원망의 에너지가 더 컸다.


아빠와 친엄마 헤어지자 할머니 주선으로 새엄마가 들어왔다. 그리고 남동생과 여동생을 낳았다. 할머니가 나에게 유독 잘 챙겨 준 이유가 '친엄마한테서 못 컸다.'라는 이유다. 나를 자기 새끼처럼 키웠다. 심리적으로는 고모와 아빠 그리고 나는 형제 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나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그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결과 낱낱이 파헤치고 재 조립하는 과정을 10여 년 간 거친 이후에야 실루엣 정도 그려진다. 내면체계가 어떻게 구성되어서 지금까지의 내 삶이 펼쳐진 것인가를 알아가는 동안 많은 비밀을 알게 되었고 무의식이 왜 무서운 지도 발견했다.


다시 아이의 질문으로 돌아간다면 새엄마가 두 동생을 낳아서 살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꽤나 복작복작 거리는 집이었다. 늘 집에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할머니의 인맥과 인덕 덕분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2년 만에 새엄마도 가출을 했다. 아빠라는 사람이 내 친엄마와 못 살게 된 이유가 아마 새엄마가 도망간 이유와도 비슷하다고 본다. 거기에 새엄마의 어리숙함, 그러니까 지능이 정상 범주 치고는 약간 모자랐다. 학습 능력이 떨어지고 답답한 구석이 있어 빠릿빠릿한 아빠에게 늘 구박을 받았다. 할머니가 계실 때는 그나마 이해와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지만 할머니가 안 계시니 아빠로부터 고스란히 당하던 새엄마는 가출했다.


그리고 아빠마저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었다. 그간 너무나 많이 풀어헤쳐진 내용이라 여기서는 간략히 지나간다. 이후 나와 동생 둘은 흩어져야 했다. 아빠가 돌아가시자마자 고모는 나를 친엄마에게 보내려 했다. 나는 친엄마에게 가려면 내가 두 동생들을 다 데리고 갈 거라고 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된다. 친엄마에게 가려면 나만 가면 된다. 동생들과 내 엄마는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내가 고집을 피운 것이다.


그 고집 때문에 나와 여동생은 고모집에 남동생은 작은집(작은 아빠 역시 배다른 동생이다)에서 살기로 했다.


'엄만 왜 엄마랑 같이 안 살았어요?'라고 다시 물어도 '그러게... 모르겠네.'

정말 모를 일이다. 나 한 몸이면 충분히 친엄마한테 갈 수 있는데도 내가 동생들을 벗어나지 못했다.


방학 때면 남동생을 만나러 갔다. 방학을 함께 보냈다. 언젠가부터 남동생의 표정이 어둡다. 거짓말도 하고 돈도 훔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말도 더듬고 자다가 오줌도 싼다. 뭔가 느낌이 안 좋아서 어떻게 지내는지 꼬치꼬치 캐 물었다. 작은 아빠한테 맞는단다. 몸을 살펴보니 멍자국이 심하다. 맞다가 똥오줌을 쌀 정도로 넋을 잃은 적도 있단다. 화가 나서 경찰에 신고한다며 대들었다. 나를 때리려는 작은 아빠가 차마 못 때린다. 동생을 데려가라고 한다. 짐 싸서 왔다. 아빠가 죽고 나서 받은 보상금이며 모든 게 어른들 마음대로 다 흩어졌다. 겨우 고1이다. 우리끼리 살게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이 과정도 복잡한 일이 많았다. 결국 우리 셋이서 함께 살았다. 아빠가 죽고 나서 4년 만이다.


가장이 죽게 되면 맏이에게 책임의 무게를 더하는 위로가 있다.

'이제 네가 가장이니까...'라는 말로 시작해 결국에는 동생들을 책임져라. 어른들한테 잘해라는 타이름이다. 얼마나 마음을 옥죄는 말인지 당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아직 세상모르게 살아야 되는 아이가 생활비 걱정을 해야 되고 끼니마다 반찬을 걱정해야 된다. 혼자 학교 다니기도 버거운데 동생들 도시락에 준비물까지 챙겨야 한다. 누군가 도와준다고 오지만 기간은 짧다. 그들이 필요한 것은 봉사활동 인정받는 것이다. 하물며 고모도 우리를 돌본다는 이유로 늘 앓는 소리를 한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내 엄마에게 갈 수 있었다는 것을...

내 엄마에게 연락해도 된다는 것을...

그런데 나는 그냥 내가 다 짊어져야 되는 줄 알았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내 어린 시절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처음인데 아이가 묻는다. 왜 친엄마가 있다면서 같이 안 살았냐고, 동생들은 엄마가 다른데 왜 책임져야 됐냐고...


그러게 말이다.

나는 그 당시 몰랐다.

다 내가 책임져야만 되는 줄 알았다.



늘 도맡아서 책임지려는 태도는 할머니로부터 배운 습관이다. 어린 나에게 할머니의 모든 모습은 모델링 될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챙기고 살뜰하게 살피고 어루만져주는 모습을 배운 나는 책임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식하며 살았다. 그것이 당연한 줄 알고 받아들인 나는 '네가 굳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거야'라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서운해진다. 아니 낯설다. 세상을 오래 산 어른이 해야 될 행동을 아무런 힘도 없을 아이가 스스로 짊어지면서 산 셈이다.


동생들도 자기 엄마를 찾아주면 되는 것을 몰랐다. 내가 내 엄마에게 가면 된다는 것을 몰랐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래서 그렇게 산 것이다.


지금의 내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또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때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으니까...


언젠가 내 엄마랑 크게 말다툼을 한 적이 있다. 왜 여상을 갔냐고, 왜 자기랑 의논한마디 안 하고 다 결정하느냐고 나무라길래 '엄마가 날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왜 참견이냐'라고 소리 질렀다.

나에게 여상을 가서 일찍 취업해 동생을 돌봐야 된다고 한 것은 고모였다. 자기가 언제까지 우리를 돌볼 수 없으니 그래야 된다는 말에  따랐다. 고모는 그렇게 권했지만, 내 엄마는 자기랑 상의 없이 내리는 내 행동 때문에 속상해했다. 그때 나는 오히려 내 엄마를 형편도 모르는 속물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엄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됐다.

그전의 나는 내가 그렇게 사는 것이 최선이고 그렇게 시켰기 때문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어린 시절의 나는 할머니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따라 하는 삶을 살았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고민해서 살아 보지 않았던 같다.


이상하다는 것을 대학 가서야 알게 됐다. 전문대라도 꼭 가라던 엄마 말에 대학을 갔다가 내가 쓸데없이 많은 짐을 스스로 짊어지고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그것을 처음 알게 된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늘 죽고 싶어 했다. 그간의 삶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최고조에 달했던 것이다. 어른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니 나는 한발 내 딛기가 너무나 버거웠다. 그랬다. 모든 게 무의식적으로 할 때는 버겁지 않던 것이, 나 자신만 위해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무서웠다. 그러니 엄마랑 같이 살겠다는 결정도 못 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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