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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은별 Feb 10. 2024

오늘은 내가 너의 우주

서로에게 우주가 되어 주다

평소 나의 우주가 되어주는 남편이 가끔 말도 통하지 않고 벽 보다도 더 답답하게 굴 때가 있다. 바로 오늘 같은 명절이다. 22년 째다.


남편은 형제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결혼했다. 삼 형제의 둘째로 어려서 형에게 많이 맞고 자랐다고 한다. 형의 화풀이 대상이 자신과 동생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아버님 역시 여러 번 사업 실패로 그 화를 집에서 풀었다고 한다. 남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면 나보다 더 위로가 필요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살아내는 삶을 보면 책임감 있어 보이고 씩씩한 모습에서 신뢰가 생겨 평생의 동반자가 되어도 좋겠다고 마음을 먹었기에 결혼을 결심했다.


결혼은 현실이라고 하더니, 결혼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남편의 모습을 실제로 경험하게 됐다. 특히 화풀이를 당한 사람의 삶을 듣기만 하다 자신이 내게 그 화를 풀어 댈 때는 나 역시 공격성이 높은 편이라 가만히 받아내지만은 않았다. 더군다나 전혀 상관없는 일마저 밥상머리에서 이야기하다 괜히 반찬이나 국물 맛을 트집 잡아 분위기를 흩트리는 날이 잦자 정면 승부를 본 적이 있다. 우리의 신혼은 몰랐던 서로를 발견하며 맞춰가는 격동으로 채워진 적응기였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많이 싸웠다. 서로의 모르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후회와 자책을 하며 신혼기를 보냈다. 그리고 아이들이 태어나자 나의 공격성은 현저히 떨어졌다. 아이들 앞에서는 싸우고 싶지 않고 되도록이면 내가 삭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편의 심기가 무엇 때문에 뒤틀리는지, 왜 그런지를 알기 때문에 까다롭고 예민한 다혈질의 남자아이 하나 키운다는 느낌으로 대했다. 그러다 하루는 말도 안 되는 사건이 터졌다. 내가 1박 2일로 워크숍을 가게 되어 한 달 전부터 이 날을 위해 준비를 했다.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될지 남편의 허락은 물론 혹시 모른 대비책으로 동생에게도 부탁을 했다.


워크숍 떠나기 전날에는 아이들에게 내가 하루 없을 동안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와 나와 연락할 수 있는 시간을 알려주며 재웠다.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나누며 그렇게 평화롭게 워크숍을 맞이하는가 싶었다. 새벽부터 나와야 하기에 잠자는 아이들을 살펴보고 나왔다. 그리고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둘째가 울며 전화 왔다.


"엄마! 엄마 공부하러 간 거 아니야? 엄마 우리 버린 거야? 엄마 집 나간 거라면서! 아빠가 엄마 집 나갔다고 이제 우리끼리 살아야 된대!! 으~앙!"


운전 중이라 길게 통화할 수 없어 우는 아이를 달래고 첫째랑 통화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첫째도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아빠가 이제 우리끼리 살아야 된다고, 자기도 이제 집 나갈 거래. 엄마 정말 집 나간 거야? 우리 버리는 거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엄마 오늘부터 공부한다고 하루만 자고 온다고 했는데... 그게 전부야. 엄마가 나가길 어딜 가. 엄마 공부하고 와야지 자격증이 나와. 그래서 가는 거야. 이거 다 끝나면 당연히 집에 가야지! 엄마가 어딜 간다고... 엄마는 집 나가는 거 할 줄 몰라."


"알았어. 진짜지? 그럼 내가 아빠 혼 좀 낼께! 아빠가 우주한테 엄마가 집 나갔다고 하니까 나도 무서웠어!"


속에서 천불이 났다.

'이 개자식. 니가 아비냐. 자식들 불안하게 만들고. 내가 결혼하고 10년 이상을 단 한 번도 밖에서 자고 온 적이 없구먼... 어디서 내 새끼들한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욕을 다 끄집어내서 씩씩 거렸다.


워크숍 장소에 도착해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짜고짜 욕을 퍼부었다.

자기는 장난친 것이라고 한다. 어디서 이딴 장난을 치느냐고 다그쳤다.


"니 엄마가 집 나갔다고 나까지 집 나가길 바라냐. 너 하나 불쌍하게 컸으면 됐지. 왜 멀쩡한 내 자식들까지 불안하게 만드느냐. 왜 거짓말해서는 나까지 불편하게 만드냐."라며 아는 욕을 다 퍼부었다.


듣다가 자존심 상했는지 "장난이라잖아!"라며 끊는다.

다시 장문의 메시지를 넣었다.

장난이라고 넘기기에는 지은 죄가 크다고 남편의 죄책감을 한껏 부풀려 놨다.


그리고 그날 저녁 1박을 해야 되는 숙소에 들어가지 않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밤늦게 집에 도착하니 아이들은 자고 있고 남편은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남편을 근처 학교 운동장으로 끌고 갔다. 질질 끌고 갔다. 안 그럼 머리카락 다 뽑아버릴 기세로 끌고 갔다.

소리소리 질렀다.


"너! 똑바로 들어! 내가 무슨 일 있어도 너 안 버려! 너랑은 안 헤어진다고! 최소한 우주가 스무 살 될 때까지는 앞으로 15년이야. 그사이에 내가 사고로 죽지 않는 이상 너랑 헤어질 일 없어! 그러니까 다시는 내 자식들 앞에서 그딴 농담하지도 마! 너란 놈이 이렇게 쓰레긴 줄 진즉 알았어야 됐는데.... 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랑 절대 안 헤어져! 네가 뭔 짓을 해도 안 헤어진다고. 굶어 죽어도 다 같이 굶어 죽을 거고, 무슨 일이 생겨도 다 같이 그 일 헤쳐 나갈 거라고! 니 엄마처럼 집 안나가!"


남편이 뭐라고 하는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날 운동장에서 울면서 폭발해 버리고 집에 들어가 아이들 옆에서 잠을 잤다. 아이들이 깨기 전에 새벽에 일어나 다시 워크숍 장소로 향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니 남편이 한상 가득 배달 음식을 차려 놓고 케이크에 불을 붙인다.


"이제 이거 끝났으니까 자격증 나오는 거지? 오! 석은별 축하해! 대단하다!"


남편이 아이들에게 엄마한테 축하한다고 인사를 전하라고 종용한다.




내가 남편에게 우주가 되어 주겠다고, 그 불안한 세상에서 빠져나오라고, 그 세상은 예전에 다 끝난 것이라고... 우리는 우리의 세상을 살아가면 된다는 것을 절규했던 날이다.

그 울음이 그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자기가 무슨 짓을 해도 나는 떠나지 않을 거라고 믿게 된 것이다.


자기 엄마가 아버지에게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던 모습을 보면서

"엄마. 이 집에서 도망가면 안 돼?"라고 말했던 그 꼬마가 엄마가 떠나는 날 가방을 들어 버스정류장까지 배웅 갔다고 한다. 그 꼬마가 선택한 엄마의 해방이 내도록 자기 마음속에 얹혀 있었던 것인지 내가 집을 비우던 날 그의 불안에 불이 지펴졌고, 나는 그것을 온몸으로 막아 꺼 버렸다.




남편은 나와의 결혼 생활이 자신에게 자부심이 생기는 것 같다. 형제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번듯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누구나 이렇게 사는 것이 평범한데 어쩜 당신 가족들한테는 이게 자랑거리가 되어야 하느냐고 물으면 '니가 모르는 그런 게 있다.'라고 한다. 나는 잘 모르겠다.


오늘은 명절이다. 결혼 안 한 형을 굳이 불러들여 떡국 먹고 가라고 한다거나, 혼자 계신 아버지를 굳이 모시러 가서 떡국 드시라고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가족을 챙기는 효자인가 라는 생각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평소 얼마나 형과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원망을 못 버리는 사람인지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라도 명절에 가족들을 불러들여서 자기가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 괜히 뿌듯하고 그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가 보다고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린 시절 자신에게 화풀이하고 함부로 대하던 형과 아버지의 힘없고 초라해진 모습에 이렇게 대응하며 의기양양해지고 싶어 하는구나.


그래 오늘은 내가 너의 우주가 되어 줄게.

마음껏 으시대 보시라... 하지만 나는 많이 귀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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