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나는 골목마다 똑같이 지어진 집에서 한 번은 주인집으로 한 번은 셋방살이로 그렇게 살았던 기억이 있다. 가정의 경제 상황이 급격하게 바뀌게 된 배경에는 할머니라는 존재의 유무가 크게 좌우되었다.
할머니가 있던 시절의 기억은 제법 괜찮은 조건 속에서 괜찮게 살아가며 주변에 인심을 나누는 입장이었다. 외가에서도 엄마와 아빠의 결혼에 승낙한 이유 중 하나가 우리 집이 잘 살았던 것도 있지만 동네에서 할머니에 대한 평이 좋은 편이었다. 어른의 모습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생이 줄줄이 딸린 엄마 입장에서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시집가는 것이 요즘의 '취집'과 같은 의미가 아니었나 싶다.
꽤 오랫동안 나는 저녁 5~6시가 되면 심장에 무슨 알람이라도 있는 것처럼 갑자기 심박수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온몸의 기운이 빠지며 무력한 상태가 된다. 이도저도 결정 할 수 없는 그런 상태로 접어든다. '무력감'이 그대로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마블의 영화 중에 타노스가 보석을 다 되찾자 생명체가 갑자기 흩어져 사라지는 장면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나는 그런 공상을 자주 하곤 했다. 실컷 잘 놀던 친구들이 5~6시가 되면 여기저기 부르는 소리에 사라진다. 흩어져 사라져 버린다. 나를 부르는 사람은 없다. 당시 곳곳에는 공사현장이 많았다. 지금 그 동네를 가보면 다 오래된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다. 그 아파트들이 지어질 때 내 세대들은 공사 현장이 놀이터였다. 모래가 한껏 쌓여 있는 곳에서 모래성을 짓기도 하고 신발을 숨기기도 하고 벽돌을 쌓아 올려 집을 지으면 공사하는 아저씨들이 막 쫓아내기도 했다. 지금은 공사 현장에 접근할 수도 없지만 35년 전의 그때는 안전에 불감한 시대였다. 모래 놀이를 실컷 하던 동네 꼬마들이 다 사라지고 난 후 혼자 남게 된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때부터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더디 뛰는 느낌을 경험했다.
여름에는 해가 늦게 지기 때문에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지만 해가 일찍 지는 겨울에는 5시 근처만 되면 아이들이 사라지는 것을 미리 감지하듯 내 심장은 쿵 내려앉았다.
한 때 상담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때 이 부분에 대해서 나누었는데 상담 선생님의 임상 경험이 짧은 데다 현실치료를 바탕으로 좋은 세계의 관점에서 설명하는데 크게 와닿지 않았다. 뭔가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 공허하고 헛헛해하는 이 마음에 대해서는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친구들과 제주도 여행을 갔다가 다시 이 마음을 느꼈다. 제주도의 평일 오후는 꽤나 조용하다. 온 세상이 조용한 느낌이다. 우리가 묵은 숙소를 중심으로 산책을 하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찾는데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아릿한 느낌이 들었다. 숙소는 우리를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친구들과 나는 그 숙소를 향해 걸어가는 길에 저 멀리서 지는 석양을 보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무도 불러 주지 않는데 이렇게 열심히 가야 한다니!
누가 불러주기를 그렇게나 바랬던 마음이 일렁이는 울음이었다.
다시 초등학교 4학년때로 돌아가면 그때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시점이다. 내게 가장 큰 힘이 되어 준 할머니가 안 계시니 새엄마는 나를 챙겨주지 않는다. 오히려 나에게는 무심한 사람이다.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 동생들에게 쥐어 주던 사람이었다. 할머니가 안 계신 집에는 나를 반기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동네 꼬마들이 다들 엄마의 부름을 받고 집으로 들어갈 때면 나는 나를 불러주지 않는 집 쪽으로 여러 번 힐끗 거리며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그러다 하루는 교회의 강대상(교회에서 설교하는 대) 밑에서 잠이 들었다. 아마 돌아가신 할머니를 찾으며 나를 데려가라고 기도했던 것 같다. 내가 없어진 것을 알고 아빠가 이리저리 찾다 교회 강대상 밑에서 잠들어 있는 나를 보고 혼냈다.
"때 되면 집에 들어와야지! 여기서 자고 있으면 어쩌냐!"며 소리 질렀다.
옆에 있던 새엄마를 보는 순간 설움이 일어났다.
"다들 집에서 부르는데... 나는 아무도 안 부르잖아. 나 할머니한테 갈래."라며 설움을 터트렸다.
그날 이후로 새엄마가 나를 불렀을까 떠올려 보면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내 이름 자체를 잘 안 불렀다. 내가 알아서 시간 맞춰서 들어가야 했다. 그 길이 그렇게나 싫었고 내 집 같지 않았다.
제주도에서 친구들과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그날의 기억이 상기되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다. 친구들이 있고, 우리는 함께 같은 곳을 향해서 가면 되는 상황이었다. 늘 외로워하고 헛헛해하던 아이가 그날 불쑥 나타난 것이다. 아무도 불러 주지 않지만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가는 이 길이 좋았던 모양이다.
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나에게 관심을 가져 보기로 했다. 그전에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심리공부를 했다면 이제는 나를 알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서 그런 성격이 됐는지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왜 하루를 유쾌하게 잘 보내다가도 저녁만 되면 심장이 쿵 내려앉았는지, 내 주변 현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나만 덩그러니 남아 으슬으슬 떨어야 했는지, 집집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때면 나의 외로움은 더욱 깊어졌는지... 내 속에 내가 모르는 나는 도대체 얼마나 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그래야 나를 좀 더 잘 보살필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주도 여행이 10여 년 전이다. 그 이후로 저녁시간의 헛헛함은 많이 줄었다. 아마 친구들과 함께 숙소로 돌아오던 그 산책길에서 공사장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던 내면의 아이 일부가 떠나 준 것 같다. 11살의 아이에게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차가운 냉장고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면 그 아이를 잘 보내 준 지금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따뜻한 온탕에 들어가는 기분이다. 밥 해달라는 기다림이지만 나를 기다리는 아이들과 남편이 있고,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가족이 '온탕'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