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상대방이 너무 싫고 두렵고 미웠다. 어떻게든 멀어지고 싶고 내 앞날을 위한 방책을 마련하고 싶었다. 회사 식당에서 다른 부서 동료와 밥을 먹다가 내 험담 내용을 들었다.
손이 느리다. 이해를 잘 못하는 것 같다. 낭창하다. 요즘 애들 기본이 안 되어 있다.
내 뒤담에서 요즘 애들 뒷담으로 이어진다.
사실 그녀를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그녀 옆자리에 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작년에 거기 있던 여직원은 2주 만에 나간 사람도 있을걸?"
"힘든 거 없어? 커피 한잔 뽑아 줄까?"
"또 안 갈구디? 나라면 하루도 힘들 거야."
"이번에는 뭐라고 트집 잡디?"
그녀 옆에 있다는 이유로 나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나에게 친근하게 다가와 나를 위로한다.
처음에는 운이 없어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운이 없을 수 있는가 싶어 슬펐다. 화가 나지도 않는 상태가 슬픈 상태인 것 같다. 나는 화가 나면 오히려 슬픔보다는 화를 풀어내기 위해 힘이 생긴다. 하지만 슬플 때는 미워하기도 힘들어지는 것 같다. 선배가 한껏 자기감정을 못 이겨 나에게 퍼붓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적이 있다.
'아. 이 사람 지금 나한테 소리 지르고 있지만 이 사람이 보는 건 나 아니구나. 이 사람이 겪은 누군가에 대한 걸 나한테 푸는 거구나. 숫자 틀렸으면 수정하라 하면 되지, 왜 이렇게까지 난리지?'
"죄송해요. 선배. 다시 꼼꼼하게 볼게요. 제가 느려서 답답하시겠어요. 저도 노력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지켜 봐 주세요."
쉽사리 진정하지 않는다. 잔소리가 끊임없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아.. 이 선배 이런 잔소리 듣고 살았구나. 정말 괴로웠겠다. 누구지? 엄마가 그랬나? 아버지가 그렇게나 잔소리꾼이었나?'
"너 이번 딱 한 번만 더 기회 준다. 담엔 진짜 가만 안 둬!"
"네... 근데요 선배... 물 한잔 드릴까요?"
"됐어! 물이나 먹고 정신 차려란 거니?"
속으로 말한다. '잘 아시네요. 그래요. 찬물 한 사발 드시고 정신 좀 차리세요. 난 네가 아니에요.'라고 했다.
상당히 똑 부러지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가진 그녀이다. 회사에서도 일 하나는 잘하기 때문에 누가 쉽게 뭐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과 걸핏하면 싸운다. 혼내고 지적질하고 야단친다. 마치 자기 회사인양...
하루는 선배가 몇 년 동안 자기만 관리하던 엑셀파일을 내게 주면서 어떻게 쓰는지 가르쳐 준다.
그때 처음 알았다.
"선배! 혹시 선생님 하고 싶었어요? 정말 차근차근 잘 가르치시네요!"
그랬다. 의외였다. 자기가 만든 엑셀을 띄워 놓고 매크로를 돌린 것 하며 그간의 데이터 관리와 파일정리를 보여주며 관리하는 방법을 알려주는데 상당히 일목요연한 데다 전달력이 좋았다. 교사를 했으면 꽤 잘 가르쳤을 것 같다는 생각에 불쑥 나온 말이었다.
"어! 너 뭐야. 내가 장래희망이 초등학교 선생님이었어! 내가 전에 말했었나?"
"아니오. 한 번도 들은 적 없어요. 지금 선배가 가르치는 거 보는데 갑자기 떠올랐어요."
그날 이후 며칠간은 편했다. 처음으로 선배가 내 자리에 커피를 뽑아 놓기도 했으니 말이다.
아주 가끔 사람들에게서 고약한 모습을 보면서도 그 뒤에 숨은 아픔을 만날 때가 있다. 그때의 나는 자주 마음이 혼란스럽다. 지금 상대방의 행동에서는 단호하게 나를 보호해야 되는데, 나도 모르게 알아 버리는 상대의 텅 빈 세상 때문에 미워 하기는커녕 안쓰럽게 바라보게 된다. 되려 연민을 느끼게 된다.
과거 내가 퇴사하고 나서 퇴직금마저도 홀딩시켜서 나를 괴롭혔던 선배가 바로 그녀다.
자기 딴에는 제일 잘해 준 후배였는데, 내가 도저히 못 참겠다고 나왔다. 그리고 선배를 견디기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내가 벌써 네 번째 고발자였다.
최근 새롭게 시작한 일에서 그때의 그녀와 같은 마음구조를 가진 사람을 만났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을 못마땅해하며 트집 잡으려는데 결국에는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 울분을 못 참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그리고는 내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자기에게 배신했다며 뒤집어 씌운다.
늘 공격하고 거절하고 배제하던 행동을 자신이 해 놓고서는 내가 무시했다며 바들바들거리던 사람이다.
그녀를 보면 마치 5살 심술쟁이 꼬마를 보는 기분이었다. 입맛도 까다롭고, 모든 감각이 예민해서 한껏 날 서서 부들부들 거리는 모습이다. 그녀의 마음속에 사는 5살 꼬마를 보자니 마음이 아픈데, 마흔이 넘은 모습을 보자니 짜증이 난다.
그래서 거리를 둔다.
슬슬 뒤로 물러난다.
뒷걸음치며 물러나다 보니 새로운 문이 열린다.
그 문고리를 잡자마자 낯선 세상에 던져진다.
그녀는 이제 사라졌다.
그리고 푸른 들판에서 따쓰한 햇살을 쬐며 해바라기 꽃이 가득한 밭으로 걸어가는 내 모습을 본다.
이제야 좀 따뜻해지네...
과거의 미숙한 나는 상대방이 나를 괴롭히는데도 상대방의 숨겨진 모습을 보고 안타깝다는 이유로 감내해야만 했다. 내가 그녀를 따뜻하게 대하고 인정하면 바뀔 것이라고 믿었다.
지금의 나는 과거보다는 성숙하게 나를 보호한다. 상대방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을 그대로 두고, 현실의 상호작용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상대가 미처 나를 배려하지 못하고 방해하는 상황이 되면 다가가지 않는다. 슬쩍 뒤로 물러나 '이건 네가 한 거야.'라고 귀띔한다.
미래의 나는 과거와 지금보다 더욱더 성숙해져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도 '허허'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