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석은별 Apr 03. 2024

내면의 치료자

그때의 너는 해맑았구나

며칠째 억울함과 괘씸함이 밀려온다.

그때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가급적 오랫동안 머무를 조용한 장소가 필요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사고를 칠 것 같았다. 그래서 찾아 간 한옥 책방에서 명상을 시작했다.


이 억울함의 시작을 찾아보기로 마음먹는 순간 100원을 받겠다고 그 많은 빨래를 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어쩌면 내가 그 아이를 구하러 가야 되겠구나 싶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며 그날을 찾아간다.

그 아이를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방에는 여자들 대화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린다. 들락거리는 동네 꼬마들... 나는 부엌에서 빨래한다. 빨간 대야 앞에 앉아서 빨래한다. 손이 시린데도 빨래한다. 그래야 될 것 같다. 아무도 나한테 왜 하냐고 묻지 않는다. 마치 내가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다지 억울해하는 표정은 아니다. 내가 이걸 하고 나면 돈 100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그다지 억울해하지 않는다. 다만 양이 너무 많아서 빨리 끝날 것 같지 않으니까 답답해한다.

내가 그때의 나에게 물었다.     

‘에구... 이 많은 빨래.. 네가 하고 있네.’

‘응. 이거 하면 100원 준댔거든.’

‘100원 받으면 뭐 하려고?’

‘그냥 군것질이나 하지 뭐. 다른 애들 아폴로 사 먹던데 나도 그거 먹으려고.’

‘그냥 빨래 안 하고 100원 달라고 하면 안 돼?’

‘나도 그러고 싶은데 아무것도 안 하고 달라고 하면 잔소리가 심하잖아. 그냥 이거라도 하고 당당하게 받는 게 좋아.’     

‘너는 당당한 걸 좋아하는구나.’

‘응! 나 당당하게 살랬어. 남의거 얻어먹으려 들지 말고 비굴하게 징징대지도 말고... 그래야 평생 내가 씩씩하게 잘 살 수 있다고 했어.’

‘누가?’

‘할머니가’

‘할머니가 좋은 걸 가르쳐 주셨네... 그런데 너무 힘들면 안 해도 돼. 하기 싫다고 해도 돼. 그래도 괜찮아.’

‘응 알았어. 고마워. 다음에 하기 싫으면 그때는 안 하고 싶다고 할게. 알려줘서 고마워.’

.

.

.

울음이 난다. 그 아이는 해맑다. 너무나 해맑다. 맑은 에너지가 가득하다. 그 아이가 하는 일은 그냥 그 아이의 즐거움인가 보다. 남의 눈에 안쓰럽게 보이고 안타까워 보일지라도 최소한 그 아이는 즐긴다. 당당함을 즐긴다.     


그 아이를 바라본다. 당당한 척 연기하는 아이가 아니다. 그저 당당한 아이다. 그렇구나. 억지로 하기 싫어서 하는 아이가 아니구나. 뭔가 좀 불공평하긴 하지만 그래도 100원을 당당하게 받을 수 있다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아이구나.



갑자기 억울함이 싹 가신다.

내가 그때 그 아이를 구하러 가려고 했는데, 그때의 그 아이가 지금의 내 억울함을 말끔하게 해소시켜 준다. 그 아이는 100원 받고 빨래를 해도 그저 해맑았다. 그 맑음에 30년 후의 내가 치유된다.

이 억울함은 그때의 나를 돌아봐 달라는 메시지가 아니었다.


항상 과거로 돌아가 뭔가를 정화하고 치유해야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이 너무 고통스러운 나는 과거로 돌아가 그때 그 아이로부터 치유받았다.


오늘을 나로 잘 살아내다 보면 언젠가 미래에 힘들어할 나 또 일으켜 세울 수 있지 않을까?


해맑은 그때의 나... 고마워.

이전 07화 텅 빈 눈빛에서 슬픔을 느끼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