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by 석은별

남편에 대한 마음이 정말 다 정리가 된 건지는 잘 모르겠어.

다만 지금은, 내가 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기대를 했는지, 그리고 그 기대들을 하나씩 알아차리고 거두어들이는 중이라는 건 분명해.


나는 그에게 너무 많이 기대고, 요구했고, 그리고 내가 바라는 걸 얻지 못하면 화가 났어.
속이 부글부글 끓을 때도 있었고, 무시당한 것 같아 억울하기도 했고, 그게 쌓이면 더는 견딜 수가 없었지.


그건 아이들에게도 똑같았어. 내가 좋은 엄마로 살고 있는데, 너희도 좋은 아이가 되어야 하고, 남편도 그에 걸맞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어느 순간부터 무언의 압박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네.


그 모든 게 결국엔 '의존'이었다는 걸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 나는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웠고, 그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너무 비참해서, 죽을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어.
그래서 눌렀지. 자꾸 눌렀더니, 그게 결국 더 자라났어.


그 두려움과 의존심을 가리는 데 사용한 게 바로 ‘역할’이었어. 어떤 역할을 하면 좋은 사람이고, 어떤 행동을 하면 좋은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지, 나 혼자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짜고, 그 안에서 살았지. 그 안에 갇힌 거였어.


그리고 진짜 나...
사랑받지 못하면 죽는다고 믿는, 그 애는 너무 깊은 곳에 묻혀 있었어. 다시는 올라오지 못하도록 눌러두고 살았지. 난 그 애를 모른 척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라벨만 붙잡고 버텼던 거야. 그러니 삶이 불균형일 수밖에.


어느 날, 아이들도 없고 일정도 비어있는 날, 오롯이 나만 바라보는 시간이 찾아왔어. 나는 뭐로 살아왔을까. 뭐를 위해 여기까지 왔을까.


왜 지금 이 타이밍에 남편에 대한 분노가 이렇게 거세게 올라오는 걸까.


천천히 따라가 보니, 그 안에 화내고 있는 내가 있었어. 참고 누르고 잊은 줄 알았던 내가, 끊임없이 소리치고 있었어.
“억울해.”
“왜 내 감정을 네 마음대로 재단했어.”
“왜 수치심이나 억울함이 올라올 때마다 외면했어.”


나는 그 목소리가 남편 때문에 억울한 줄 알았어. 남편을 향한 소리인 줄 알았어. 그러나 그 목소리가 향한 건, 나였더라.


남편이 어떤 사람이든, 나는 나를 알아줘야 했는데.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게 뭔지, 내가 어디서 상처받았는지를, 내가 들여다봤어야 했는데.


나는 평소엔 부당한 거 보면 말도 잘하고, 맞서기도 잘하면서, 왜 남편의 폭언 앞에선 그렇게 조용했을까. 왜 아이들 앞에서 욕을 들으면서도, 그 입을 막지 못했을까.


화는 남편을 향한 게 아니었어. 말릴 수 있으면서도 그냥 두고 있었던 나에게 향한 거였지.

그리고 그 침묵 속엔 분명 계산도 있었어.
‘참는 엄마’, ‘착한 피해자’,
‘아빠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아이들에게 심어줘서, 내 편을 만들고 싶었던 마음.
아마 있었을 거야.


나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순간들을 스스로 미뤘고, 타인의 시선을 끌어들여 내가 불쌍한 사람처럼 보이게 했고, 그렇게 스스로를 고정시켰어.


그 과정에서 아이들도 더 작아졌겠지. 그건 몰랐어. 정말 몰랐어.


이런 시간들을 지나며 이제야 알게 된 게 있어.

나는 혼자 있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어. 무서워하지도 않더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이 편하고, 잔고가 얼마든 상관없이 풍요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야.

그때 그 해맑고 순수한 아이...내 에너지의 원천인 그 아이 여전히 있더라.


그런데 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 이유는 늘 같았어.


내가 나와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를 자꾸 제쳐놓고, 타인의 감정, 타인의 입장, 타인의 반응을 먼저 생각했어. 그러면서 내 감정은 미루고 눌렀어.


나는 내가 ‘자유의 상징’이라는 걸 너무 자주 잊었지.


그 모든 건... 익숙해진 의존 때문이었어. 내가 만든, 나를 계속해서 타인의 사랑을 구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놓은 습관.


조금 거리를 두고 보니까, 이 의존이 내 삶에 얼마나 많은 흔적을 남겼는지 보여.

정말로, 모든 건 내 안에서 시작된 거였어. 내가 창조했고, 내가 선택했고, 내가 반복했던 거야.

그 안에서 성취도 있었고, 기적 같은 순간들도 있었지. 하지만 동시에 잃어버린 것들, 아팠던 기억들, 그것들도 다 내가 쥐고 있었던 거야.


이제는 조금씩 알겠어. 어떻게 하면 이 창조의 힘을 더 자유롭게, 더 균형 잡히게 쓸 수 있을지.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하더라.


가볍게, 무심하게, 판단하지 말고 그냥 바라보는 거. 그러면 모든 일이 가장 좋은 방향으로 흐르더라고.

혹시 눈앞에 거센 태풍이 닥친다 해도, 그조차도 나를 더 나은 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다는 걸 믿는 것. 그게 '바라보기'라는 걸, 이제는 알아.


이제부터 나는, 내 불안이나 혼란을 없애려고만 하지 않으려 해. 그건 그저 또 하나의 감정일 뿐이니까.

현실이라는 이 어지러운 무대 위에서 또다시 허둥지둥할 수도 있겠지. 근데 그럴 때마다, 익숙하게 길들여 둔 명상 상태로 조용히 돌아오려고 해. 그게 내 삶의 리듬을 다시 찾는 길이니까.


허둥지둥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 그게 내 전략이야.
감정에 휩쓸리는 대신 감정을 이해하고,
누군가를 탓하는 대신 내 감정을 나에게로 돌려주는 일.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렇게 살아갈 거야.


그리고 이 편지가, 앞으로 또 흔들릴지 모를 미래의 나에게 조용한 등불이 되어주기를 바라.

마지막으로,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어.


내게서 올라오는 그 어떤 감정도, 이제는 외면하지 않을게. 서툴러도, 낯설어도, 아파도... 다 소중하고, 다 환영이야. 나는 나를 그렇게 사랑하기로 했어.


너에게, 지금의 내가.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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