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추천으로 교회를 옮겨 보았지만 모교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쉽게 적응하기 힘들었다.
다소 보수적인 교회 분위기에 익숙한 나에게 지인의 교회는 너무나 개방적이고 비주얼이 강한 문화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내가 낯가림이 심한데 교회 환경도 낯가림이 있구나.
하나님은 나를 낯가리지 않을 텐데 내가 정착할 교회가 없다는 서글픔에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채로 지냈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그 허전함을 마음공부로 달랬던 것 같다.
상담을 전공하면서 내면을 파고드는과정이 깊은 묵상기도 끝에 나오는 어떤 묘한 만남과도 같았다.
나를 더욱 알게 될수록 깊어지는 무언가가 있다.
나는 가족 관계에서부터 성장 과정을 객관적으로 적다 보면 '결핍'이 두드러지는 부분이 많다.
누구든 내 히스토리나 가족구도를 보면 부모에 대한 결핍이 있겠네, 학력에 대한 결핍이 있겠네. 꿈을 이루지 못 한 상처가 있겠네라고 한다. 아예 불우한 환경이라고 낙인찍어서 보는 동료도 있고, 대놓고 '나는 삶의 굴곡이 심한 사람이랑은 좀 불편해. 괜히 그런 사람들하고 있다 보면 내가 평범하게 자란 것을 이야기하는 게 죄책감 들거든.'이라며 나를 지목해서 불편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과도 같이 일했다.
작고 큰 에피소드들이 많은 가운데 남들과 조금은 다르게 혼자만의 길을 가고 있다.
내가 가는 방향은 '영혼의 회복'을 향한 길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성별을 불문하고, 직업이나 가치관 종교도 불문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영혼을 만나야 한다는 뜻에 가치를 심고 누구나 자신을 만나야 하고 그 과정을 돕는 역할을 자처했다. 이 일을 가장 잘해 낼 수 있는 직업이 나에게는 종교 지도자도 교사도 아닌 심리상담사로 와닿았고, 그 길을 가고 있다.
나는 안다. 내가 이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종교를 만들거나 어떤 집단을 만들어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배와 저항의 에너지가 높은 나의 에고를 알아차리고 있기에 절대적으로 그 힘을 함부로 쓰지 않고 치유에만 쓰기 위해 다짐했다. 만약 나에 대해 공부하지 않고 살았다면 내가 속한 어떤 환경에서든 이단아가 되었을 거라 본다.
어느 날템플스테이라는 것을 신청했다.
어려서 할머니와 함께 절에 갔다가 절밥에 체한 후로 절을 멀리한 나였다.
그런 내가 템플스테이에서 예불에 참여하다니!
예불에 참여 하면서 오열했다.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 눈물이 내 온몸을 씻어주는 기분이었다. 예불 내도록 커다란 부처님상에 대한 거부감은 여전했고, 목탁 소리는 내 신체의 불안을 높였고, 관절을 굽혀 절을 하는 사소한 과정도 불편했다. 그렇다고 박차고 나갈 정도의 저항감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낯가림 심한 게 또 발현되는 것이구나 여기며 절을 했는데 눈물이 툭 터진 것이다.
그러고는 어떤 음성이 들린다.
"이미 모든 복을 다 받았다."라는 굵직한 음성...
내면에서 들리는 그 목소리에 얄팍한 내 에고는 눈물을 그치려고 반박한다.
'지금이 가장 궁핍하다고요.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있길 하나, 늘 궁지에 몰리는 삶을 살고 있는 기분인데. 복은 무슨 복이요! 가진 것도 없고 받은 것도 없는 나한테 세상은 늘 달라고만 해요. 다 뜯어먹겠다고 덤비는 벌레들처럼...'그렇게 항변하다가 문득 '아... 맞네. 이미 다 받았네. 다 받았어!'라며 장단을 맞춘다.
실컷 따지지도 못하고 바로 수긍한다.
따지는 그 한마디 한마디에 지금껏 살아온 모습의 이미지가 스쳐 지나가는데, '지금의 나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라는 말과 함께 '이미 모든 복을 다 받았습니다.'라고 수긍했다.
더욱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심장의 펌프질로 온몸에서 열감이 느껴진다.
딱따구리가 쪼는 것 같던 머리도 맑아진다. 몸의 순환을 느끼는 순간 내 몸이 그 공간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구성요소들이 나의 일부로 느껴지면서도 나의 몸이 내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모순을 곀었다.
분명 내 몸이 들어 있는 곳은 법당인데, 내게서 들리던 그 음성은 어려서 자주 듣던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내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어떤 삶의 고민을 들고 있든 내가 듣고자 하는 순간에 적절하게 들리게 하는 그 음성이었다.
'이미 모든 복을 다 받았다.'는 뜻을 이해하게 된 순간.
이 복은 내 육신의 한계가 다하는 날까지 한정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결핍이 충만으로 바뀌는 순간을 생생하게 느낀 후 삶이 달라졌냐고?
삶은 그대로다. 매달 돈 걱정은 여전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예민함도 그대로, 가족들과의 작고 큰 마찰도 그대로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대로이다. 갑자기 복권이라도 당첨된다거나, 나와 사이가 불편한 사람들과 화해한다거나, 안될 것 같은 일이 갑자기 잘 풀린다거나의 변화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 횡재수는 없었지만 딱 하나 변한 것이 있다면... 모든 과정이 '어차피 다 지나갈 거야.'라는 받아들임이다.
매 순간에 겪는 장면이 생생하게 느껴지며 말 한마디, 표정하나, 크고 작은 행동들이 완벽한 시나리오 속에서 흘러가듯 느껴졌다.
결제일이 다가오는데 세금계산서 발행하라는 연락이 없으면 초조해서 대출이라도 받아야 되는가 머리를 썼다면, 결제일이 다가오는데 여전히 세금계산서 발행하라는 연락이 없지만 늦더라도 계산서는 발행될 것이고, 수금 떼먹던 업체 A가 안 주면 B에서라도 들어와서 채워질 것 같았는데, 실제로 그렇게 된다.
내가 못하겠을 때 '이것은 내가 해결하는 게 아니구나.'라고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문제가 해결이 안 되네.'라고 알리기만 하면 그 일은 해결이 되기도 한다. 아무런 행동을 안 하는 것이 아니다. 적절한 시기에 필요한 행동을 하면서 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미 모든 복을 다 받았다.'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복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내 속에서 끊임없이 속삭이는 에고를 잘 다루어야 한다.
에고는 틈만 나면 타인을 의심하게 속삭이고, 내일을 걱정하게 만들고, 실컷 잘 준비한 것도 실패할 것이라고 겁준다. 초조하게 만들고, 조바심 나게 만들고, 불행의 주인공으로 느끼게 만든다. 이 에고의 목소리를 잘 구분하고 나면 내가 실제로 겪는 현실은 여유와 자유, 풍요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마치 내가 지나갈 때마다 초록색 불이 바뀌고, 주차장에 들어서면 때마침 차 한 대가 빠져 준다거나, 연락하려고 떠올린 친구가 카카오톡으로 안부를 물어 준다거나, 안경을 부러트리고 들어온 아들의 안경을 사야 되는데 안경값만큼 주식이 오른다거나, 먹고 싶은 반찬을 떠올리면 남편이 그것을 사서 들어온다거나 등의 사소한 일들이 삶에 기적처럼 일어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소소한 행복이고 내가 이미 받은 복인 것 같다.
이미 다 받았다는 그 복...
육안 뿐만 아니라 심안으로도 볼 수 있는 지혜가 아닐까 싶다.
아무리 봐도 일상은 변화가 없는데, 일상을 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졌을 뿐인데 삶이 풍요로 꽉 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