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한 것을 바꾸는 것도 책임
무조건 곁에 두는 책임은 없다.
물건을 샀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게 된다. 계속 쌓아두자니 번잡하고 누군가 주자니 마땅치 않고 버리자니 아깝다.
그렇게 쌓아 둔 물건이 하나 둘 늘어 집안 가득 채운다.
버림받는 것에 두려움이 큰 사람들은 쉽게 버리지 못하는 병에 걸린다.
사소한 것에도 의미와 이유를 붙여 곁에 두려고 한다.
두면 언젠가는 쓰일 것이라는 이유다.
그렇게 두었다가 쓰이는 경우도 간혹 있긴 하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문서이거나 물건인 경우는 아닐 때가 더 많다.
남편은 보통 사람들 보다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면을 살펴보니 사실은 손절하고 싶고 거리 두고 싶은 마음이 큰데도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먼저 손절하기에는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고, 상대방이 나를 손절하면 버림받는 것에 대한 아픔이 일어날까 싶어서이다.
그 버림받는 고통이 어떤 통증인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기에 이해해 주고 살아왔는데, 이제는 나마저 그 이해의 수준을 비켜가는 시점이 됐다.
그리고 냉정하게 다시 현 상황을 바라봤다.
갑자기 콧웃음이 쳐진다.
어린 시절 내 부모나 주 양육자가 나를 버린다면 나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상황에서 목숨이 왔다 갔다 했겠지. 그때는 처절하게 매달리거나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왜? 버림받으면 죽을 목숨이니까. 그만큼 연약하고 허약하니까. 어린아이니까 당연한 것이다. 그때의 고통스러운 감정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서른이 넘고 마흔, 쉰이 넘어서도 누군가가 나를 버리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처절하게 아파해야 한다면 그것은 생각해 봐야 될 부분이다. 심리적으로 어린아이의 상태가 활성화되는 부분이다. 성인의 몸으로 성인까지 살아온 삶의 경험을 빗대어 보면 누군가 나를 손절하고 떠나든 내가 누군가를 손절하고 떠나든 그것은 '버림받음'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나의 생존을 책임진다거나 안위를 보살펴 줘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나에게 어떤 권한도 없는 사람이 떠나는 것에 대해 마치 내 생존권을 갖고 있는 사람이 떠나듯 처절하게 매달리는 것... 이것이야 말로 허상에 붙잡힌 애착이다.
허상으로 몸부림치며 아우성대는 것과 마찬가지다.
때로는 잘 버리고 정리를 잘하는 것이 현실에 훨씬 더 도움이 될 때가 많다.
아니 대부분이 도움 된다.
상처받은 기억, 아픔이 머물렀던 흔적에 시선을 고정하면 그 부분에서 돌아가는 영상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좋았던 기억, 나답게 살았던 기억에도 시선을 고정하면 그 부분 역시 돌아가는 영상이 쉽게 꺼지지 않는다.
이 두 부분에서 무엇이 내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는지를 비교할 힘만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후자의 영상을 선택하게 된다. 후자가 훨씬 가볍다. 그리고 현실도 그렇게 될 것 같은 기대감에 며칠 동안 돌돌 말고 있던 이불을 벗어던지고 씻으러 들어갈 힘이 생길지도 모른다.
버려야 될 기억은 없다. 다만 선택할 기억은 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억지로 책임지거나 버려야 할 사람은 없다. 만약 책임져야 한다면 유일하게 자기 자신이다. 버려야 한다면 유일하게 자기의 에고이다.
한번 선택했다고 해서 끝까지 가야 된다는 것은 없다. 그 끝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무의미하다. 각자가 다른 시간표를 들고 살아가는데, 타인을 자신의 시간표에 억지로 끼어 넣어 함께를 외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있을까?
얼마 전 남편이 직장에서 오랫동안 일하던 직원을 정리했다.
그 직원은 걸핏하면 실수하고, 경영에 손실을 끼치는 일이 반복됐다.
남편이 중요하게 전달해야 되는 공지사항을 알려주면 자기만 알고 다른 직원들에게 알리지 않는 일도 빈번했다. 그 사람을 불러 함께 밥도 먹어보고 여러모로 살펴보면서 친해졌지만, 인간적인 친함과 일을 같이 해야 하는 파트너와의 관계는 같은 선상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이 여러모로 힘들어했다. 그동안 일을 잘 가르친 후배들을 떠올리며 그도 그렇게 될 것을 기대했지만, 사실 잦은 실수는 그 사람의 능력치가 낮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고, 때로는 그가 받는 돈 보다 더 적게 받는 직원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됐다. 6년이라는 시간을 두고서 이제야 그 동료와 노선을 달리하게 되면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나 자신도 책임지기 급급한데 타인을 나보다 더 우선시해서 책임지려 했던 것이 어쩌면 자기의 선택을 번복하는 것에 대한 자기 부적절감을 피하기 위함이었지 않았나... 자신의 선택이 틀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받아들이지 않으려 애써 그 직원을 감싸는 동안 주변에 잃은 것들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실은 여러 번 냉정한 조언을 했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는 나에게만 들려왔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편하지 않았던 시간들이었다.
남편의 과도한 책임감으로 자신이 가장 사랑한다는 우리 가족에게 피해가 가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라도 발견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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