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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심장이 멈추다

도망이 최선은 아니야

by 석은별

가끔 불현듯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여러 시공간이 지금 이 순간에 공존하고 있다는 가정을 종종 체험할 때가 있다. 어느 곳에 있는 나는 굉장히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을 살아간다. 그곳에서 남편에게 거의 매일 폭언과 폭력에 노출되면서 살고 있는 것 같다. 그 시절의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실제로 그렇게 산 적은 없는데 너무나 생생하게 그 장면이 떠오른다. 밥 먹다 말고 숟가락을 던지는 것은 일쑤고 밥상을 뒤엎어 버리거나 욕하고 발로 밟고 등등의 무참한 폭력을 그대로 당하는 모습이다. 나는 왜 그렇게 살까? 나는 뭐 때문에 그런 인간을 못 벗어나고 살까?

도대체 나는 그 장면을 어디에서 본 것일까?

내 어린 시절인가? 아니면 내 부모의 어린 시절인가? 나와 친했던 사람들의 경험인가? 내가 상담한 사람들? 도무지 그 출처가 어디인지도 모르게 생생하다. 그저 생생하다.

그 때문인지 종종 남편이 밥 때문에 민감해지면 나도 모르게 그 장면이 활성화되어서 나에게 격한 공격을 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분명 그 일은 내 생애 있었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내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할 것 같은 공포가 일어난다.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 있는 나는 굉장히 고통스럽구나.’라고 직감하게 된다.

그리고는 마음으로 메시지를 보낸다.


"그곳에 굳이 있을 필요 없어. 네가 지금 어떤 상태이든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어. 그 공간을 벗어나! 그리고 구조 요청해. 도와달라고 울부짖어. 차라리 울부짖어."

아무도 도와주지 못할 것 같은 무력감과 두려움에 그러지 못하겠다고 응답한다.

"그래. 전에 그렇게 도망쳐서 나갔더니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외면했지. 그런데 그건 그때고 지금은 몰라. 지금 어떨지 아무도 몰라. 그러니 당장 그곳에서 나와. 신고라도 해! 아니면 옆집에라도 찾아가. 넌 그곳을 벗어나! 그래야 살아. 그곳에서 그렇게 고통스럽게 맞을 이유가 없어. 너 왜 맞니? 네가 아무리 큰 잘못을 했다고 해도 그 폭력은 절대로 정당한 게 아니야. 제발 벗어나. 돈이 없어? 잠잘 곳이 없어? 그래도 나와. 제발 나와. 갈 곳이 없다고? 괜찮아. 그냥 나와. 제발 나와!"


나는 그저 나오라는 신호밖에 줄 것이 없다. 그것이 누구든 간에 그러한 경험을 한다면 그 피해자를 향해 당장 도망쳐. 얼른 도망쳐!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문득 생각한다.

과연 도망쳐라고만 하는 것이 최선인가?

그래서 그녀는 도망쳤을까?

그래서 그녀가 도망친다면 그녀는 어디로 가야 될까?

그녀가 정말 원하는 것은?

그녀가 정말 간절히 바라는 것은?


그저 그의 폭력이 멈추기를.

그의 술주정이 멈추기를.

그가 제발 잠들기를. 잠든 그가 제발 일어나지 않기를...

그녀는 도저히 그곳을 벗어날 용기가 없다.

그곳을 벗어나서 갈 곳이 없다는 사실.

그 처지가 그녀를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녀는 바라고 또 바란다.


나에게 도망치라고 벗어나라고 도움을 요청하라고 하지 말라고!

이미 여러 번 도망쳤지만 늘 붙잡혔던 것이다.

그녀가 바라는 가장 최선은

그냥 지금 나를 때리는 이 새끼의 목숨을 앗아가라고.

신이 있다면 이 새끼를 죽여달라고

그래야 내가 살 것 같다고.

그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나를 어디로 가라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아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


세상을 더 못 믿겠으니, 더 살아갈 힘을 잃게 될 것 같으니

차라리 맞는 게 세상을 믿을 힘을 남겨 놓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말에 눈물이 났다.


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여 그렇게 처절하게 맞고 있는 그녀가 아닌 때리는 놈에게 소리친다.


"멈춰! 당장 멈춰! 멈춰란 말이야 이 새끼야!"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끌어 모아 기도한다. 이 장면에서 이놈의 심장이 멈추기를... 나와 똑 닮은 그녀를 구할 수 없다면 그저 내가 끌어 모아서 할 수 있는 일은 때리는 그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행동에 죄책감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취중에 있는 사람에게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되든 안되든 그를 향해 온 힘을 모아 전달한다.


"멈춰. 멈추란 말이야. 멈춰.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알란 말이야."


얼마나 그를 향해 외쳤을까.

조용하다.

그가 쓰러진다. 코를 곤다.

그의 꿈으로 들어가자. 꿈으로 들어가는 건 오히려 쉬울 테니. 그의 꿈에 나타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했던 행동을 똑같이 경험하는 것이다. 그에게 무자비한 폭력과 폭언으로 다가간다. 그의 고통과 울부짖음과 저항에 어떤 연민도 없이 그를 향해 날린다.


"한번 더 이렇게 그녀를 괴롭히다가는 심장을 멈추게 할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는다. 실제로 나는 그의 심장을 멈추게 할 수 없다. 그러나 그에게 한번 더 이런 행동을 하면 심장이 멎을 것이라는 말에 힘을 싣는다.

그것만이 최선이다.


잠에서 깬 그는 뭔가 찜찜하다.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아 그녀를 향해 술을 사 오라고 소리친다. 술을 사러 나간 그녀를 향해 또 욕을 한다. 그녀는 술을 사서 들어왔다. 남편이 자는 모습을 보고 술병을 옆에 두고 어질러진 집을 치운다. 집을 한창 치우다 문득 남편을 돌아본다. 그는 자는 게 아니다. 그는 죽었다. 그의 숨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그의 심장이 멈췄다.



그의 심장은 그가 멈추게 한 것이다.

그 꿈에서 듣게 된 말을 그는 믿었던 것이다. 그렇게 또 하다가는 심장을 멈추게 할 것이라는 말을 그대로 믿었던 그였다. 그는 그 말을 믿고 그대로 자신의 심장을 멈췄다.


이제 나머지는 그녀가 알아서 하겠지




상상인지 공감인지 망상인지 도무지 알 길 없는 이러한 스토리를 끈질기게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홀가분해지는 나를 만난다. 나는 지금 뭘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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