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함께한 이태리 20일 #10 바포레토
베니스는 물의 도시이고, 이 물의 도시를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은 역시 곤돌라나 바포레토를 타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나 곤돌라는 생략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연인 사이라면 몰라도 남자끼리 한 배에 앉아서 사랑 노래를 듣는 것이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바포레노(Vaporetto)는 베니스의 주요 교통수단으로 그냥 '수상버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검색을 하면 바로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노선도를 구하는 일은 쉽지만, 그 노선도를 보고 곧바로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베니스의 겨울은 우기라고 들었지만 날씨도 좋았다. 다만, 혼자 하는 혹은 친구랑 하는 여행이 아니라 동행인을 보호해야 하는 여행인 만큼 약간 걱정이 되었다. 나름대로 노선도를 보고 연구를 하긴 했지만 만에 하나 혹시 배를 잘못 타서 숙소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갈아타는 건지, 어느 방향으로 가는 건지 정확히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바포레토에 대한 공부가 부족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 날을 잡고 24시간 티켓을 끊었다. 그날은 바포레토만 타고 돌기로 했다. 이런저런 실수를 하더라도, 만약의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걸어서 돌아오면 그만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공식 사이트에 나오는 설명은 바포레토의 이용이 아주 쉬운 것처럼 되어있다. 약간 축약하긴 했으나 '5단계만 따르면 된다'는 설명이다. 일단 살펴보자.
1. 정류장(ACTV stop) 찾기
바포레토 정류장은 베니스 맵에 나와있고, 걷다 보면 보게 되어 있다. 노란색과 흰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쉽게 눈에 띈다. 주의할 점은 큰 정류장의 경우 플랫폼이 여러 개 있기 때문에 어느 선을 타는 것인지 정확히 보고 가야 한다. 보트 번호와 가는 방향을 나타내는 사인을 찾아야 한다. ( 예를 들면 "No. 1 toward San Marco" 같은 방식이다. )
2. 티켓이나 패스를 사기
큰 정류장에는 자동판매기가 있고, 그렇지 않으면 티켓 부스를 이용하면 된다. 좀 비싼 옵션도 있긴 한데, "Venezia Unica city pass"를 사는 것이다. 이걸 살 경우에는 베니스 시가 관리하는 박물관이나 공중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
3. 티켓을 찍고 들어가기
모든 정류장에는 입구에 '티켓 리더'를 볼 수가 있을 것이다. 티켓을 대면 '삑'소리가 나고 초록색 불이 들어온다. (이용권은 우리나라 지하철의 1회용 티켓과 아주 유사하게 생겼다. 그러니까 '투입식'이 아니고 '접촉식'이다. 배에 탈 때가 아니라 플랫폼에 들어갈 때 티켓을 리더기에 대는 방식이다.)
4. 플래폼 쪽으로 걸어 들어가라
플랫폼은 물 위에 둥둥 떠 있는데 거기에 기다리는 장소가 있다.
5. 바포레토를 기다려라
바포레토가 들어오면 노란 선 뒤에서 기다려라. 먼저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내리고, 그다음에 선원이 타라고 손짓을 한다. 검표원이 표를 보여달라고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승선할 때 따로 티켓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
출처 : http://europeforvisitors.com/venice/articles/venice-vaporetto-traveling.htm
우리의 계획은 아주 단순했다. 산마르코 광장 쪽에서 바포레토를 타고 베니스의 북쪽면으로 접근한 다음, 그 북쪽면에서 유리공예로 유명한 무라노 섬으로 가는 배편으로 갈아타자는 것. 위 노선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LN 17'이라고 되어있는 노선이 LIDO로 향하고, 이 LIDO에서는 'LN 16'이 무라노로 향하는 것으로 나와있다.
바포레토가 지도에서 보기에 베니스의 오른쪽 끝자락으로 접근할 때 까지는 기분이 정말 좋았다. 쨍한 날씨며 상쾌한 바람, 그리고 소설 속에 들어온 듯한 풍경들에 나와 동행인은 감탄할 뿐이었다.
그런데, 바포레토는 내가 생각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속으로 '어, 어' 하는 사이 배는 물살을 가르며 멀리멀리로 가고 있었다. 내 느낌은 인천에서 영종도로 향하는 배를 탔는데 그 배가 영종도가 아니라 제주 쪽으로 향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림의 오른쪽 화살표처럼 배가 계속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LIDO에 가지 않고 바로 Punta Sabbioni로 향했던 것이다. 정말 이러다가 베니스로 돌아가지 못하면 어쩌는 건지, 예약했던 차편과 숙소는 또 어떻게 되는 건지 정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났다. 그러나 동행인에게는 아무 일도 없는 척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동행인은 우리가 행선지와 다른 방향으로 간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배는 제주까지 가지는 않았다. 마음을 졸이는 사이 배는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육지를 향했다. 그곳은 Punta Sabbioni 였다. 베니스 쪽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구글 지도로 보아 충분히 숙소로 돌아갈 수 있는 거리라고 판단되었다.
배에서 내려 화장실 지킴이 알바 분한테 ( 이태리 화장실에는 돈을 받는 분이 꼭 계시다. ) 이것 저것 물어보았다. 여기서 무라노 섬으로 가는 배편이 원래는 있는데 겨울에는 잘 없고, 베니스로 돌아가는 배편도 그리 많지 않으니 바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동행인에게는 이렇게 통보했다. 뭔가 잘못되었다. 무라노 섬으로 가는 계획은 취소되었다고.
대신 우리는 선착장에서 한 백여 미터 떨어진 곳, 모터보트를 접안하기 위한 바다 위 나무 데크에 누워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파랬고, 저 멀리엔는 흰색을 뒤집어쓴 높은 산맥이 보였다.
예정되었던 일정을 소화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나의 것이었을 뿐, 동행인은 오히려 '하지 않음'으로 갖게 된 무료한 여유를 즐기는 듯했다. 어쩌면 여행이란 것의 아름다움은, 여행책자에 나온 바로 그곳에 내가 있었다는 증명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음으로써 비로소 느끼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관광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곳에서 혼자 여행하는 60대 아주머니를 뵈었다. 영어를 잘 못하셨는데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내친김에 우리도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사진을 확인해 보니 우리의 모습보다 프레임 안에 들어와 있는 그 아주머니의 그림자가 더 컸다. 하지만 그게 더 좋았다.
배가 도착하기 20여분 전, 터미널에 도착해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고 이 배가 산마르코 광장 쪽으로 가는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재차 확인하고 배에 올랐다. 이제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멀리서 산마르코 광장 쪽이 보이기 시작했다. 속으로 '살았다!'고 소리쳤다.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은 광장의 건물들이 더 따뜻한 빛으로 반짝였다.
해가 건물들 위에 걸렸을 때, 광장의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빛 속의 작은 빛들. 신기하게도 폰카로 그 신비한 장면이 포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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