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이기적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잘못된 것이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행동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의 행동방식을 다른 사람이 결정해줄 순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 스스로 생각해야 하고 결정해야 되며 행동하게 된다. 단, 전제가 하나 필요하다. ‘나의 생각과 행동이 미치는 영향과 범위가 단 1명, 바로 나로 한정된다’라는 전제가 말이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나 혼자 있는 시간보다 타인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많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작년부터 마라탕이 한창 인기를 끌고 있지만, 내가 마라탕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내가 먹을 이유도, 먹을 필요도 없다. 단, 나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경우에 말이다. 친구와, 동료와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마라탕을 좋아하지 않지만, 마라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나 혼자만의 생각과 느낌만으로 마라탕을 먹지 않아야겠다고 결정할 순 없기에 “조율”이라는 과정이 필요하게 된다.
가끔씩 조율의 방식은 극과 극으로 나타나게 된다. 세 명이 밥을 먹으러 가려고 할 때, 세 명이 모두 각자 먹고 싶은 메뉴를 얘기하는 경우가 있고, 세 명이 모두 먹고 싶은 메뉴를 얘기하지 않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1) 모두 각자 먹고 싶은 메뉴를 얘기한다.
모두가 매사에 적극적이고 자기의 경험과 생각을 얘기하는 데에 거침이 없다. 마라탕은 예전에 한 번 먹어봤는데 맛이 없더라, 예전에 만난 여자 친구가 봉골레 스파게티를 좋아했는데 그 여자 친구한테 차인 이후로 봉골레 스파게티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나는 땀이 뻘뻘 날 정도로 매운 음식을 좋아하니 매운 갈비찜 먹는 게 어떻겠냐 등등. 먹고 싶어 하는 메뉴를 얘기하는 데에도, 먹기 싫어하는 메뉴를 얘기하는 데에도 열심이다. 점심 메뉴 고르느라 시간이 허비된다. 점심을 먹는 시간보다 점심 메뉴를 고르는 데 필요한 시간이 더 많다. 가위바위보를 하던, 다음에는 너가 좋아하는 메뉴를 꼭 먹기로 협약을 하던 어떻게든 결론을 내야 한다.
(2) 모두 각자 먹고 싶은 메뉴를 전혀 얘기하지 않는다.
모두가 자기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다. 모두가 자기의 생각과 경험을 얘기하는 데에 소극적이다. 모두가 다 잘 먹는다고 하고 모두가 아무 메뉴라도 괜찮다고 한다.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오늘 먹을 메뉴를 주장하지 않는다. 어떡하지, 어딜 가지만 모두가 남발할 뿐이다. 주위를 둘러본다. 주위에 가본 곳이 있는지, 무난한 메뉴가 있는지 살펴본다. 설사 내 눈에 들어오는 식당이 있다 하더라도 ‘저기는 어떨까’하는 생각을 고이 접어 마음속에 담아둔다. 누군가가 강력하게 메뉴 하나를 주장해주길 바라고 있다. “좋아”라고 말할 준비는 되어 있다.
극단적이다. 모두가 적극적이지도 않고 모두가 소극적이지도 않다. 누군가 한 명쯤은 적극적인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누군가 한 명쯤은 소극적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예 없는 경우는 아니다. 그리고 세 명 모두가 그렇지는 않더라도 나는 그럴 수 있다. 나는 적극적인 사람일 수도 있고 소극적인 사람일 수도 있다. 극단적인 상황을 세 명의 기준이 아니라 나 한 명의 기준으로 바라봤을 때는 늘 있는 일이다. 어떨 때는 적극적으로 얘기하고, 어떨 때는 소극적으로 얘기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얘기를 하던 안 하던 둘 중 하나의 행동방식을 고수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때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거 같이 느껴지고, 상대방이 보기에는 주장이 너무 강해서 맞추기 힘들다라고 느껴질 수가 있다. 그러나 비록 개인의 생각과 성향에서 비롯된 주장이라 하더라도 소극적인 사람에게는, 혹은 모두가 소극적인 상황이라면 그 주장이 필요할 수가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상대방의 생각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소극적인 상대방에게는 그건 배려가 아니라 결정을 미루려는 무책임으로 다가가기 마련이다.
모두가 적극적인 상황에서는 한 발 양보해서 내 주장을 조금 미뤄두고, 모두가 소극적인 상황이라면 내가 적극적으로 한 번 나서보자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만 쉬운 일이 아니다. 살아오면서 나만의 생각과 나만의 방식이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하다. 산다는 건 연습의 과정이다. 눈 감는 날까지 연습이 필요하다. 연습을 하지 않는다면 부딪히고 깨질 수밖에 없다. 연습을 하고 훈련이 되면 지난날보다는 조금 더 보람되게 살 수 있다. 모두가 머뭇거리는 상황에서 내키지는 않지만 내가 나선다면 모두가 다행인 상황이 될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한 번 들어보려고 한다면 원만한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혼자 살 순 없다. 어차피 하루 이틀 살 것도 아니다. 앞으로 있을 2천만 가지의 상황 중에서 1번을 내가 하던 방식과 다르게 해 본다고 해서 나의 존재가 부정되거나 세상이 뒤집히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