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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Nov 06. 2020

나이가 든다는 건(8) - 추억이 많아진다는 것

‘오늘, 기억은 추억이 됩니다.’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내가 만들어 본 광고 카피라이트이다. 대학교 시절 마케팅이라는 분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광고 관련 수업도 듣게 되었다. 수강 신청할 때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듯이, 이론적인 수업과 더불어 광고를 기획하는 일도 과제 중에 포함이 되어 있었다. 바라던 바고 해보고 싶었던 바였다. 광고를 기획하는 과제를 조별과제로 해야 된다는 점을 빼고는. 조별과제는 애초에 그런 건가 보다. 애초에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이 나누어져 있고, 애초에 열 받는 사람과 태평한 사람이 나누어져 있기 마련인가 보다. 그래서 콘티를 짜는 일, 콘티를 그리는 일, 발표까지 내가 맡게 되었지만, 광고를 만들어본다는 그 자체가 너무나 즐거웠기에 큰 불만 없이 내가 많은 부분을 담당하겠노라고 자원하였다.


광고를 할 제품을 먼저 선정해야 했다. 요즘은 핸드폰 카메라가 워낙 잘 나오기 때문에 사진이라는 영역에 누구나 큰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지만, 당시(2000년 대 초중반)에는 사진을 찍는 일은 거창한 일이었고, 고가의 DSLR 사진기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겨지곤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엄청난 혁명이었고,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물론 그 전에도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작고 예쁜 디자인으로 패션 아이템의 역할까지 하는 제품은 그때쯤에서야 시중에 나왔고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러한 유행과 트렌드에 맞추어 광고를 할 제품은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선정했고, 그럼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어떻게 광고해야 사람들이 구매를 할 수 있을까 머리를 모으고 생각을 쥐어짜냈다.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이 어느덧 성인이 되어 직장인이 되었고, 바쁘다는 핑계로 몇 년 동안 보지 못하다가 어렵게들 시간을 내어 한자리에 모인 날. 철없고 어렸던 옛날 일들을 기억하며 수다를 떠느라 얼굴에는 웃음꽃이 가득하였고, 그런 흥겹고 아련하고 행복한 분위기를 잊지 말자고 친구가 꺼내 든 것은 폴라로이드 카메라. 브이를 하며 어깨동무를 하며 그날의 장면은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은 사진으로 남겨지고, 이때 잔잔히 광고를 마무리하는 멘트가 ‘오늘, 기억은 추억이 됩니다’.


오글거리기도 하고 유치하기도 한 것 같았지만 광고에 관심이 많았고 카피라이터를 동경하던 시절에 이렇게나마 광고를 제작해보는 일을 경험해보았다는 생각에 아직까지 그때의 일들이 눈에 선하다. ‘기억’이란 것은 옛날에 있었던 일들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다시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고, ‘추억’이란 것은 옛날 일들을 다시 한번 곱씹어보고 느껴보고 그 일이 있었던 시절 나의 감정과 생각들을 느껴본다는 의미로 생각하고 짧은 글귀를 만들어본 것이었다. ‘억’이라는 글자로 라임을 맞추어 본 것이기도 한 것은 물론.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힘든 일도 있었고, 기쁜 일도 많았다. 그 당시에는 죽을 것만 같고 도망치고만 싶었던 일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그 일들을 통해 배운 일도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고3 수험생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가겠냐고 물어보면 절대 아니라고는 하겠지만 힘들었던 그 시절에도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장난도 치고 놀기도 했었던 추억들이 있었고, 힘듦과 기쁨이 공존했었던 그때의 분위기와 그때의 감정들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남아있다. 12시간 행군을 하던 군 복무 시절이 즐거웠냐라고 물어본다면 싸우자는 것이냐고 대답은 하겠지만 잠을 자면서 발이 움직여지고, 아이스크림 하나로 죽다 살아난 것만 같았던 그 시절의 느낌은 아직 눈에 선하고 지나고 나니 보람있었다라고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전 일들을 떠올릴 때 단순히 6하 원칙에 의해 그 일들을 정확히 기억해내는 경우도 물론 있겠지만, 그때 당시의 나의 상황과 감정과 생각들을 함께 떠올려보는 경우도 많다. 특히나 감정을 건드리는 어떤 무언가가 그 시절 함께 했었다면 더더욱 말이다. 19년간 살아온 고향을 떠나 처음 서울 하숙집에서 생활하게 되었을 때 너무나도 낯설고 너무나도 어색한 나와 함께 했었던 것은 임창정 6집과 양파의 베스트 앨범이었다. 개인적인 감상을 배제하고서라도 임창정 6집은 참 명반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나의 연인’, ‘너의 꿈에 부치는 편지’, ‘낮에’ 등 너무나도 좋은 노래들이 그때 낯섦과 어색함을 견디게 해 주었다는 나의 생각이 더해져 더더욱 좋아하는 앨범으로 추억하고 있다. 익숙한 것을 벗어나 낯선 곳으로 잠시 떠나게 됨을 노래한 양파의 ‘다 알아요’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좋아하는 가수였는데 외국으로 유학을 가느라 베스트 앨범을 발매했었고 그때의 타이틀곡이었는데, 지금도 들으면 가슴이 먹먹해지곤 한다. 노래 자체의 느낌도 있겠지만 그때의 나의 상황과 감정이 투영되어서 그런 것이리라.


속칭 추억팔이가 통하는 건 추억이라는 것에 대해 느끼는 감정들이 나와 다르지 않아서일 것이다. 90년대 음악들이 다시금 유행하고, 복고 스타일이 인기를 끄는 것은 이러한 추억들을 다시금 느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고등학교 시절 너무나도 좋아했던 젝스키스가 무한도전 토토가를 통해 다시 뭉쳤을 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슈가맨이라는 프로그램도 인기가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90년대 가요를 처음 접하는 요즘 세대들이야 가요 자체에서 느끼는 감정은 있을지언정 90년대를 추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90년대를 살았던 사람이 90년대 가요를 듣는 일은 90년대에 들었던 가사와 멜로디를 내가 아직 까먹지 않았는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90년대 가요를 들으면서 보냈던 시절을 추억하는 것이리라.


나이를 조금씩 먹으면서 그땐 그랬지라며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는 시간들이 자꾸만 생겨나게 된다. 비단 좋았던 일들 뿐만 아니라, 힘들었던 일들도 말이다. 힘들었던 일, 싸웠던 일들도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 떠올려보면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그땐 어렸었구나라는 생각에 잠시 잠깐의 민망함과 쑥스러움과 더불어 내가 조금 더 성숙하게 행동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에 상상력을 더해 그 상황을 바꿔보는 무의미하고 불가능한 시도도 해보게 된다. 또한 너무나도 행복하고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리며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라는 아쉬움도 느껴본다.


과거에만 사로잡혀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과거의 일들 떠올리며, 추억하며 지금 나는 어떤 상황에 있는지,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보는 일은 자연스럽기도 할뿐더러, 앞으로의 나의 행동가지에 대한 다짐을 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의 빛났던 시절을 추억하는 일은 내가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시절 또한 먼 훗날 뒤돌아봤을 때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해보고 싶다. 내가 몇 시에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를 정확히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때는 무슨 생각과 고민을 했었는지 그리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느껴볼 수 있고 곱씹어볼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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