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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 Sep 05. 2023

배드민턴과 도서관

동네 도서관에서 배드민턴세트를 보았다... 난 무얼 한 걸까?

배경 이미지 출처: Unsplash



8월의 마지막 날, 예약해 둔 책을 빌리러 도서관으로 향했다. 언제 예약해 놓았는지도 까마득한 책,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영문판을 드디어 빌리게 되어서 마음이 설렜다. 예약해 놓은 책을 찾아 돌아서는데 잡다한 물품이 놓인 선반이 눈에 들어왔다. 배드민턴세트가 유독 내 눈길을 끌었다. 악! 그렇다. 핀란드는 도서관에서 별의별 걸 다 빌릴 수 있는데, 왜 배드민턴도 빌릴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지? 동네 도서관마다 대여해 주는 물건들이 좀 다르긴 한데... 꾸준히 다니는 우리 동네 도서관에 저렇게 뻔히 있는 걸 왜 몰랐을까? 진작 알았더라면...


그가 없던 어느 일요일(8월 20일)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향했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가 아닌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큰 마트에 갔다. 내가 소풍을 위해 간단한 점심거리를 사는 동안, 아이들은 장난감 코너를 구경했다. 여름 막바지라 할인하는 장난감들이 있었다. 그 속에서 아들은 배드민턴 세트를, 딸은 버블건을 골랐다. 맘속으로 돈 주고 쓰레기를 들이는 건 아이들의 특권이라며 나를 다독였다. 그나마 할인하는 물품이니...


처음에는 장난감 배드민턴 세트를 사겠다는 아들을 말렸다. 사려면 제대로 된 라켓을 사는 게 좋을 것 같아 마트의 스포츠 용품 코너를 함께 가봤다. 도통 무얼 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들이 고른 장난감 배드민턴 세트는 1유로 50센트였는데, 스포츠 용품 코너의 세트는 저렴한 것도 2~30유로인 데다가 재고가 없었다. 일단 장난감 세트를 사서 해본 뒤 계속하고 싶다면 알아보고 제대로 된 라켓을 구매하기로 했다.


배드민턴을 칠 수 있는 장소에 다다르자 아들은 딸과 함께 배드민턴을 쳤다. 딸이 배드민턴에 흥미를 잃자 나를 불렀다. 내가 아들에게 서브를 넣었는데 셔틀콕이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아들이 배를 부여잡고 웃으며 내게 셔틀콕이 라켓에 박혔다고 말했다. 역시 싼 게 비지떡이었다. 바람 때문에 배드민턴을 치는 게 아니고 서브만 넣게 되는데도, 아들은 즐거워했다. 


아들도 싼 게 비지떡이라 생각했는지 내게 라켓을 사달라고 애교를 부렸다. 예전에 배드민턴을 치던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요넥스 거로 적당한 것을 고르라 했다. 아들 거 하나만 사는 거면 괜찮지만 세트로 있어야 하니 은근 부담스러웠다. 아들이 꾸준히 배드민턴을 친다면 괜찮지만, 아직 아이라 조금 하다가 그만둘 수도 있으니 저렴한 걸 사야 하나 싶었다.


문득 한국에 사는 절친이 15년 넘게 배드민턴을 친 데다가 남자친구가 배드민턴 선생님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부랴부랴 친구에게 오랜만에 카톡을 날렸다. 무슨 큰일 난 줄 알았는데 라켓 문의냐며 유쾌한 답장을 보내준 친구가 배드민턴을 어디서 칠 건지를 물었다. 야외에서 칠 거라자 바람 탓에 좋은 장비가 소용이 없으니 스포츠 용품 코너에서 젤 저렴한 라켓을 고르라 했다. 그러다 재미 들려 본격적으로 치게 되면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추면 된다고 했다.


그는 장난감 라켓도 괜찮은 것 같다며 일단 셔틀콕만 제대로 된 걸 사자 했다. 나는 급하게 샀다가 후회하지 않기 위해 천천히 알아보고 사고 싶었다. 아들은 마음이 급했는지 나만 보면 배드민턴을 언급했다. 외출할 때마다 스포츠 용품점에 들려 라켓과 콕을 살펴봤지만,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다 할인 중인 덴마크 브랜드 Fz Forsa 라켓이 눈에 띄었다. 원래도 저렴한 모델인데 할인까지 하니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재고처리용 할인이었는지 파는 매장이 한정되어 있었다. 일부러 그곳까지 가서 라켓과 콕을 사 왔다.


원래 잘 알아보고 괜찮은 걸 아들 생일에 사줄 심산이었는데, 아들의 보챔에 못 이겨 저렴한 모델로 후딱 사버렸다. 10월 말인 아들 생일까지 기다리면 밖에서 배드민턴 치기엔 애매한 날씨가 될 테니, 날 좋은 지금 칠 수 있게 빨리 사주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미리주는 생일 선물이라고 아들에게 라켓과 콕을 내미니 아들의 얼굴에 함박미소가 번졌다. 그리곤 함께 배드민턴 치자는 아들의 조름이 시작되었다. 강제 운동의 시작인가?


배드민턴 라켓과 콕을 사고 이틀 뒤 도서관에서 배드민턴 라켓을 마주했다. 저렴한 모델이긴 했지만 엄연히 요넥스 거였다. 저걸 미리 알았더라면 배드민턴 라켓을 보러 이곳저곳을 기웃거리지 않았도 되었을뿐더러 라켓도 급하게 살 필요가 없었을 텐데... 기운이 쫘악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핀란드 도서관에서 온갖 것을 대여해 준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온갖 것에 배드민턴세트도 포함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게다가 늘 가던 동네 도서관에 있다니... 하긴 겨울엔 썰매도 대여해 주는데, 무언들 없으리오.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도서관을 먼저 살펴야겠다. 


도서관에서 돌아와 배드민턴세트를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아들도 나와 같은 반응을 했다. "빌리면 되는데... 게다가 요넥스인데..." 요넥스 브랜드를 알다니? 의외라 여겨져 아들에게 어찌 아냐고 물었더니 나름 혼자 배드민턴에 대해 구글링을 했다고 했다. 혹시 한국어 공부를 위해 매일 조금씩 보던 드라마 중 하나였던 라켓소년단 덕에 배드민턴을 치고 싶어 졌는지 물었다. 아들은 드라마와 전혀 상관없이 얼마 전 2박 3일로 다녀온 학교 여행에서 반친구들과 함께 배드민턴을 재밌게 친 게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잊지 말자, 핀란드 도서관! 그나저나 우리 동네 도서관 선반에 우쿠렐레도 보이던데 빌려다 배워볼까?


아니, 배드민턴세트가 언제부터 거기 있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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