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뉴칼레도니아, 마치 그곳에 ‘사는’여자 처럼 -(2)
처음엔 그냥 이국적이고 경치가 예쁜 곳에, 무엇보다도 그 유명한 꽃보다 남자의 촬영지, 구준표가 “보이냐 내 마음?” 했던 하트섬이 있는 곳이니 더욱 설렜다. 하지만 모르는 말로 되어있는 그 곳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호기심과 재미에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콧대 높은 프랑스 인들이 왜 이곳을 자기네 땅으로 하고 싶어했는지 알 수 있었고, 항상 다음 누메아 일정이 기다려졌다. 정말 뉴칼레도니아는 오면 올 수록 정드는 예쁜 천국 같은 곳이었다.
입국 수속을 마치자마자 나는 누가 볼 새라 승무원증을 재빨리 가방에 넣고는 유유히 터미널을 빠져나왔다. 나오자마자 이 한적하고 조용한 섬에는 어울리지 않게 항구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투어 피켓과 여행사 버스, 누메아의 명물 츄츄트레인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시끌시끌 복잡했다.
나는 그들을 못본척 하거나, 거절하고는 내가 아는 길을 따라갔다. 마치 누메아, 이 곳에 ‘사는’여자 처럼.
자주 가는 커피숍 앞에 다다르자 내 몸보다 똑똑한 나의 아이폰이 커피숍의 와이파이를 잡으며 먼저 반응한다. 익숙한 얼굴의 종업원이 Bonsoir 하며 저녁인사를 건넨다. 웃는 얼굴로. 그리고 그 웃는 얼굴 만큼이나 정이 느껴지는 따뜻한 캬라멜라떼 한잔을 금새 만들어 테이블까지 가져다 준다. 언제나 그렇듯 나의 커피 메뉴를 세심하게 기억해 주어 고맙다. 메르씨보꾸. 나도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왜 그동안 3주 동안이나 안 보였는지 묻고 싶은 표정이 가득했지만 그녀는 묻지 않고 다시 카운터로 돌아갔다. 나도 내가 왜 못 왔었는지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나의 불어실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우리 사이엔 대화가 오가지 않았지만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3주만에 만나서 반가워 하고 있음을.
세계를 다니다 보면 가끔은 그 어떤 대화보다도 눈빛으로 더 깊고 많은 말을 전하는것이 가능할 때가 있다.
밀린 이메일을 확인하고 불필요한 이메일들을 삭제하고 다시 커피를 마신다. (배 안에서 쓰는 와이파이는 한 라인을 몇천명이 나누어 써야하니 무지 느리고 꽤 비싸다!) 그리고 남태평양의 섬 나라들에서 계간으로 발행하는 잡지
Island Life를 카운터에서 가져와 읽기 시작한다. 마치 이곳 뉴칼레도니아에 ‘사는’여자 처럼.
그리고 천천히 잔에 담긴 커피를 비우고 돈을 낼 때가 되자, 화폐의 가치가 익숙하지 않아 한참 계산을 해야하는 뉴칼레도니아 프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아 커피값을 지불한다. 약간 남을 거스름돈은 받지 않기로 한다. 이곳에 오면 내 마음도 여유로워 지는 모양이라 어쩐지 잘 안 하던 팁도 너그럽게 선뜻 건네주고 싶다.
뉴칼레도니아는 모든것이 이국적이다. 길을 걷다 들려오는 음악이, 버스안에서 틀어놓은 라디오의 음성이 불어라서 그렇다.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모르는 사람과 인사라도 나누게 되면 Hello가 아닌 Bonjour라서 그렇다. 게다가 그 불어를 쓰는 사람들이 금발에 파랑눈을 한 사람 보다도 까만 피부에 뽀글뽀글 머리를 한 원주민들이라 더 그렇다. 가끔 전혀 모르는 불어에 당황하다가도, 영어보다 일본어가 통해 버려서 더더욱 그렇다. (실제로 누메아에는 아주 많은 일본인 신혼여행객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많은 곳에서 일본어가 통한다)
까르푸에 들러 로제와인을 한 병 산다. 살 땐 어김없이 가치를 잘 몰라 한참 생각해야하는 뉴칼레도니아 프랑으로 지불한다. 올 때마다 눈여겨 보았지만, 이곳 와인은 색깔도, 병도 너무 예쁘다. 찬란한 핑크빛 로제와인 한 병은 남태평양의 석양을 머금은 듯 하다.
고작 일주일 후 이지만 다시 찾을 때 까지 이 곳 누메아는 그리운 공기일 것이다. 난 오늘 마치 누메아에 사는 여자처럼 행동 했지만 사실은 떠나야 하는 방랑자의 신분이니까.
뉴칼레도니아의 출국심사를 마친 나는 승무원증을 누가 볼 새라 급히 가방에 넣고 씩씩하게 배 안으로 걸어들어간다. 뒤는 돌아보지 않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