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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ray Jan 26. 2022

돈보다 소중한 것들.

일상 에세이

나는 날마다 걷는다. 내가 걷기 시작한 날부터 이제까지 하루도 걷지 않은 날은 없을 거다. 걷기 싫은 날에는 화장실이라도 갔을 테니까..


내 걸음은 어느 군인의 힘찬 발걸음과 같지 않다. 또한 어린아이의 활기찬 걸음과도 다르다. 오히려 마라토너가 결승점에 다다른 듯, 온몸이 질질 끌리는 발에 매달려 겨우겨우 끌려가는 정도의 걸음이다. 결승점에 거의 다 왔기에 차마 멈출 수 없어 끝까지는 가고야 말겠다는 내적 의지와 달리, 금방이라도 땅 어딘가에 누워버릴 듯 모든 힘이 빠져 발을 끌고 가는 모습과 닮았다.


그러나 내 모습이 어떠하든지 나는 걷기가 좋다. 그래서 운동으로 걷기를 시작했다. 이렇게 걸은 지 2년이 넘었다. 처음 운동으로 걷기를 시작했을 즈음  내 마음엔 그저 내가 건강해야 가족도 건강히 돌본다는 의무감뿐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의무감 대신 설레는 마음이 그 시간을 자리했다. 산책 중 떠오르는 생각들이 좋았고 길가의 나무며 스치는 바람도, 하늘과 하늘을 덮는 구름들도 나를 설레게 했다. 나무나 풀, 새와 구름 같은 것들은 언제나 내 삶의 배경들이었을 뿐 주인공들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걷기 운동을 시작한 다음부터 이런 것들은 나의 삶에 새로운 에너지를 주는 여백이 되었다. 나에게 산책이란 거대한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물론 항상 걷기가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땀으로 옷이 다 젖을 정도로 더운 날도, 밖으로 나가기 싫을 정도의 세찬 바람이 불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걸었던 하루하루. 그  연결된 시간들의 잔잔한 행복감이 나를 계속 걷도록 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을 통해 적립형 만보기 앱을 알게 되었다. 이 앱은 걸음을 걸으면 걸음수만큼 포인트가 적립되어, 적립금은 편의점에서 돈과 같이 쓸 수 있다고 했다. 지인은 그 포인트를 모아 아이에게 바나나 우유를 사 준다고 했다. 그런 세상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 검색을 통해 이런 유의 몇 가지 앱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자, 그동안 내가 무지하게 걸었던 순간들이 얼마나 후회되던지..


지난 시간들을 돈으로 환수받아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불타올랐다. 그날로 몇 개의 앱을 당장 깔았다. 어떤 앱은 이미 500만이나 사용 중이라고 했다. '내가 걷고만 있었던 사이 누군가는 돈을 벌며 걸었구나..' 갑자기 그동안의 내 걸음이 아쉽고 안타깝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여태까지 걸은 나의 걸음을 세어 포인트로 적립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것을 돈으로 환불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내가 깐 앱은 만보가 안되면 포인트에 손실이 있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포인트의 손실을 최대한 막으려 만보를 만족시켜야 했다. 그때부터 내 걸음은 어떤 군인과도 흡사하게 힘차게 변했고, 어린아이와 같이 활기가 생겼다. 돈으로 환산되는 포인트의 수치는 비록 적을지라도 이처럼 인생 끝 결승점 막바지에 다다른 마라토너 같은 걸음을 걷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힘을 주었다.


그런데 이 앱들의 몇 가지 특징들이 있었으니, 광고가 계속 떴다. 그리고 핸드폰 앞 화면을 장식한 앱의 화면은 몇 걸음 가면 포인트를 누르라고 친절히 알려주었고, 그 포인트 버튼을 안 누르면 포인트가 사라진다고 경고도 해 주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광고는 계속 뜨고, 나는 내 핸드폰 앞 화면에 뜬 광고를 확인하다가 하루가 다 갔다.


만보가 안될까 봐 계속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내 걸음의 수치를 확인했고, 포인트를 잃을까 봐 광고 화면을 계속 누르며 내가 걸은 걸음을 세서 포인트로 전환하기를 종일. 여태껏 내가 허무하게 걷기만 했던 시간들을 보상받을 수 있다면 고되고 귀찮아도 앱이 시키는 대로 버튼을 눌러야겠다고 생각하고, 하루 마감 시 포인트가 소실되기 전, 적립금으로 전환하고 나서야 마음에 쉼을 잠시 가졌다.


그러기를 이틀쯤 지났을까. 핸드폰 배터리가 충전이 안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배터리 절전모드를 다 해 보아도 배터리는 15퍼센트 이상 충전이 안돼 핸드폰 사용에 심각한 장애를 가져왔다. 검색은 물론이거니와 전화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내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었는지. 포인트는 쌓일지 몰라도 내 삶의 여백과 공간이 다 날아간 것처럼 팍팍했다. 생각을 정리할 여유도, 스치는 바람도, 하늘 위 구름도 바라볼 시간이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나는 알았다. 내가 여백이라고 여겼던 것들의 소중함을. 그것들로부터 오는 삶의 새로운 에너지는 비록 돈 한 푼 안 들어 오지만 돈과 맞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었다는 것을.


그때 나의 핸드폰이 입은 큰 손상으로 다시는 만보기 앱을 깔지 않고 있다. 그리고 바나나 우유는 그냥 먹고 싶을 때, 맘 편히 내 돈 내고 사서 먹는다.


그때 내가 만약 앱을 하나만 깔았다면, 이런 소동 없이 소박하게 "바나나 우유도 가끔 먹었습니다."로 이야기의 끝을 맺었겠지만, 탐심 가득한 어리석은 자의 최후는 이렇게 씁쓸한 법.


하지만  소동으로 나는 돈보다  소중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 그리고  없이도 누릴  있는 소중한 것들이  많다는 , 그리고 돈을 목표로 살게 되는 순간부터 내가 평소에 누리던 것들이 가진 빛은다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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