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원을 줍다

아들과의 대화

by stray

도서관 가는 길에 100원이 떨어져 있었다.


100원을 주운 아들의 눈에는 세상을 얻은 듯 기쁜 감정이 비쳤고 아들의 입에서는 "땡잡았다!!!"는 승리감 어린 기쁨의 환호가 새어 나왔다. 전에 놀이터에서 놀 때 친구들이 땅에서 돈을 많이 줍는다며 부러워한 적이 있던 아들은 오늘의 일이 무척 기뻐 보였다.


그런데 옆에 있던 아빠는 원래 땅에서 돈을 줍는 것도 현행법상 절도죄라 이야기하며 땅에 있는 것은 손도 대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다. 100원 주운 아들에게 다시 제자리에 두라는 이야기를 했지만 땡잡은 아들은 말을 들을 리 없다.


도서관에 갔다가 나온 뒤 차에서 또 한 번 아빠가 "기회를 한 번 더 줄 테니 아까 100원을 주운 그 자리에 다시 놓고 오라"고 했다. 아들은 싫다고 하며 내가 주웠으니 내 거라고 하며 아빠 말에 싫은 기색을 하며 그냥 앉아 있었다. 더 이상 실랑이를 할 수 없어 남편도 그즈음 그만하고 집으로 출발했다.


나중에 남편과 100원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게 되었다. 남편은 100원이라고 우습게 여기면 나중에 더 큰돈을 보게 되었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겠냐고 그리고 아들이 100원을 안 가져다 놓은 것은 아들 안에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좀 다른 입장이었다.


남편은 길에서 주운 만원을 경찰서에 갖다 줄 정도로 윤리의식이 발달한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남편에게 어렸을 때부터 그랬는지 물었다. 남편은 자신도 모르겠다고 한다.


나는 아들의 도덕 수준이 어른인 당신과 다르다고 말했다. 아들에게 남편이 행했던 윤리적 행동은 이야기해 주되 그것이 정답이니 그대로 하라고 말한다면 아들 편에서는 아빠의 말을 강요로 받아들여 아들의 마음에 반항심이 더 들지 않겠냐고 설명했다.


아빠가 했던 그동안의 행동들과 더불어 놀이터에서 돈을 주워 가졌던 친구들의 행동도 함께 이야기해 주면서 아들 스스로 어떤 태도를 취할지 선택해 보라고 열린 마음으로 아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준다면 아들이 스스로 옳은 것을 선택할 힘이 생기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과

몸과 마음을 움직여 그 옳은 행동을

하는 것은 다르다.


아이가 옳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부모가 어떻게 사는지를 보면 안다. 사람들은 부모가 하면 나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하고 부모만큼, 부모가 산 것만큼 산다. 그만큼만 살아도 잘한 거라 스스로 생각하면서.


그런데 올바른 것을 행한다는 것은 세상을 살며 얻게 되는 가치들을 통해 옳고 그른 것에 대해 기준이 되는 생각을 하고 그 기준에 맞춰 내 삶을 재조정함을 뜻한다.


누군가 그렇게 했으니 그대로 하면 된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가는 아이의 입장에서 설득력이 없다. 아이는 이제 아이 나름의 생각을 통해 자신이 납득할만한 논리로 자신을 세워가며 하루에도 수많은 생각 중 자신의 가치 기준에 맞춰 선택을 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 해도 부모의 행동의 옳고 그름은 분별한다. 아이들은 나름의 가치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 스스로 이런 건 해야 되고 저런 건 하지 말아야지 스스로 다짐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일 때 생각했던 것을 실천하는 경험이 어른된 우리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데 자신이 동일한 잣대로 살아갈 힘은 아직 없다. 아무리 떨어진 100원이 남의 돈이고 그냥 가지면 안 된다고 생각할지라도 그것을 보는 순간 갖고 싶어 눈이 반짝거리며 이걸 갖는다고 누가 알겠냐고 스스로 합리화하고 누가 100원을 잃어버렸다고 찾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니겠냐고 반문하고 주인을 찾아준다고 경찰서에 갖다 준들 서로 웃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들뿐 아니라 이걸 갖는다고 누가 날 도둑으로 몰 것이며 돈이 있던 제자리에 놓아둔들 누구에게 도움이 되겠으며 진짜 이 돈의 주인이 가져갈 리 없고 누군가가 가져간다면 그를 또한 도둑으로 만들게 되는 것뿐임을 순간적으로 생각하며 아빠에게 대들게 되는 결과만 가져온다는 사람의 복잡다단한 심리 대해 아직 아이는 알지 못하지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 이런 복잡함 속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옳다 생각하는 것을 스스로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저 자신의 삶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부모의 삶을 기준으로 정리해 놓는 수준이 아이의 수준일 것이다.


나는 부모로서 아이에게 옳은 행동들을 많이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아이들은 부모가 산대로 살 테니까. 하지만 아직 아이의 수준에서 생각하고 선택할 기회 또한 많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하니 내가 하는 그대로 살라고 하는 것은 아이가 자신의 나이를 건너뛰어 어른이 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이 수준에서 최선인 것을 생각해서 행동할 수 있다면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이 생각한 최선의 수준에서 살 수 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이 순간 부모로 사는 것은 보여주기의 일부분이다. 그렇다고 내 부족한 부분으로 인한 자책보다 내 모습을 변증법적으로 살아낼 아이들 될 것을 기대하며 아이들을 키워가는 부모이면 되겠다.

그러고 보면 부모 노릇하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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