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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미술 일상

노년

일상 에세이

by stray

우리의 노년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굳이 미래로 가서 사진을 찍어 보지 않아도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아마 머리카락과 그 밑 눈썹까지 새하얗고, 얼굴은 거뭇거뭇한 점과 깊게 파인 주름으로 뒤덮일 것이다. 시력이 안 좋아져 안경을 쓸 수 있으나, 눈빛은 더 또렷해져 세상의 순리를 인생의 어떤 순간보다 더 깊게 알아챌 수 있는 날카로움을 갖게 되지 않을까. 곱고 아름답던 시절은 멀리 가고 잿빛 그을음이 가깝게 여겨질 그때가 되면 우리는 각각 자신이 살아온 삶 전체가 얼굴에 투영되어 있을 것이다.



Grant Wood (1891-1942), American Gothic, 1930. Oil on Beaver Board.

그랜트 우드의 <아메리칸 고딕>에 나오는 한 노인.

단단함은 나이와 결합되면 때로 고집스럽고 완강하며 답답함을 동반한다. 젊은 시절 굳은 의지와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을 가졌던 사람은 세월이 지나면 불혹의 나이를 거쳐 어떤 말이나 일도 자신을 흔들지 못하도록 굳어진 몸과 마음을 지니게 된다. 결국 나이 들어 그에게 남겨진 것은 푸르지 못한 잿빛 머리카락과 세로로 깊게 파인 고집스러운 주름, 차갑고 냉정한 눈길. 내 것을 지키려 누군가를 해쳐도 된다는 자기 합리화로 단단해진 손이다. 눈가에 서린 피로는 여인의 근심을 자아내나 그것을 감추기 위해 부릅뜬 두 눈은 오히려 바라보는 이를 안쓰럽게 만든다. 세상살이가 고되고 힘겨웠을 개척정신으로 가득했던 노인의 젊은 날은 이제 지났고 정결한 주택 앞에서도 그 얼굴은 웃음기와 여유를 찾을 수 없으니. 그의 힘을 다했던 젊은 날의 애씀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지킴이었던가.



Norman Rockwell (1894-1978), “Going and Coming,” 1947. Norman Rockwell Museum Collections.

노먼 록웰이 그린 <가족>으로 시선을 돌려 본다.

그의 그림은 가족이 함께하는 여행에 대하여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가족여행은 언제나 활기차게 시작되지만, 피로로 끝이 난다. 창밖으로 나와 있던 멍멍이와 아이의 흥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그저 잠잠해진다. 여자 아이가 불던 풍선껌조차 여행 가는 길에서는 크게,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작게 변한다. 오가는 길에 차를 운전해야 하는 아버지. 그는 여행을 떠날 때는 자신만만하고 당당하나, 돌아올 때는 여행의 고단함을 머리에 쓴 모자처럼 눌러썼다. 이런 상황에도 머리카락 한 올, 얼굴 표정,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녀는 바로 뒷좌석에 앉은 온 가족의 할머니이자 어머니. 자세나 표정에 변화가 없기에 방향만 바뀐 고정 사진 같다. 노먼은 에너지 넘치던 세대의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도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부분이 되어 굳은 표정으로 일관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싶었던 걸까.



위 그랜트 우드가 그린 아메리칸 고딕의 아저씨 얼굴이 노먼이 그린 할머니의 얼굴에 오버랩되어 나타난다.

얼굴에는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 세월이 가면 집안 곳곳에 먼지가 쌓이듯 우리네 얼굴에도 먼지 쌓일 주름이 깊어진다. 그럼 얼굴을 책임져야 하는 노년의 나이에 우리의 얼굴은 어떠하면 좋을까?



아이들 어릴 적 자주 읽어주던 <호호 아줌마가 작아졌어요>라는 북유럽 동화책이 있다. 이 책은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서 방영된 적도 있어 우리에게 익숙하다. 이 책에는 작고 귀여운 모습의 아줌마가 등장한다. 아줌마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몸의 크기가 찻숟가락만큼 작아지는데, 그 작은 몸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야무지게 해내며, 여러 동물들과도 재미있게 소통한다. 신기하게 밀가루 반죽이든 프라이팬이든 구름이든 동물이든 세상의 모든 것들은 아줌마의 말을 잘 듣는다. 아줌마의 몸은 작지만 마음은 세상 어떤 사람보다 크다. 아줌마는 세상 모든 것들을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사랑으로 감싸 안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아줌마가 하는 말들과 행동 하나하나가 이야기를 듣는 자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 준다.

알프 프뢰이센, <호호 아줌마가 작아졌어요> 삽화

호호 아줌마의 이야기는 사실 현실과 그리 동떨어져 있지 않다. 배고픈 자를 위해 먹을 것을 만들어 주며 놀잇감이 필요한 아이에게는 인형을, 일상에 위기가 닥치면 번뜩이는 지혜와 이야기로 삶을 재치 있게 가꾸며 살아나가는 호호 아줌마는 우리 주변에도 널려 있다.


그럼에도 호호 아줌마와 함께 펼쳐지는 이야기는 우리 마음을 넉넉하고 따듯하게 만들어 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웃다 보면 우리는 늙기를 잠시 멈출 것만 같고 얼굴의 주름은 하나씩 펴질 듯하다. 이러한 유머와 따듯함 넘치는 이야기들이 우리의 마음에 계속 머무른다면, 우리의 노년도 유쾌하고 즐거운 호호 할머니, 호호 할아버지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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