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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미술 일상

명화 속 전쟁 이야기

이현우, <미술관에서 만난 전쟁사> 중에서

by stray

영국과 영국령인 캐나다는 11월 11일을 1,2차 대전 전사자들을 기억하며 기념하는 Remembrance Day로 지킨다. 그들은 가슴에 퍼피(양귀비 꽃)를 달고 전쟁에 나갔던 사람들을 추모한다. 전쟁이 끝난 지 오래되어 사람들은 전쟁을 잊어가지만 그들의 추모 의식은 경건하고 그 의식을 행하는 자들의 모습은 진지하다. 아마 자신들의 친척과 가족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던 이야기가 아직도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감동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헤르만 헤세는 "전쟁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전쟁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처럼 전쟁은 인류의 존재와 공존한다. 사람들 속에 있는 끝없는 욕망은 작게는 소규모 싸움과 때로 거대한 전쟁의 내적 동기가 된다. 이로 인한 나라 간의 첨예한 외교적 긴장과 갈등은 때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미술관에서 만난 전쟁사>의 저자는 사학도이자 경제 신문 기자이다. 그는 전쟁의 역사에 관심이 있었다. 그가 전쟁 역사에 대하여 고증을 할 수 있었던 장소는 뜻밖에도 미술관이었다. 그는 "다빈치에서 뒤러, 루벤스, 렘브란트, 김홍도에 이르기까지 거장들의 붓끝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전 세계 미술관이 전쟁터가 된다!"라고 한다. 그가 만났던 미술관에서 만난 전쟁 명화는 우리에게도 전쟁과 관련된 역사적 정보를 알려준다.



병사들의 사기 진작 수단, 군복


화려한 군복은 자칫 적군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1800년대 전쟁 관련 명화의 모델들은 화려한 군복을 착용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군인들의 사기와 관련이 있었다. 옷이 귀한 시절 화려한 군복으로 군 입대에 대한 동기 유발과 추위와 굶주림, 전염병 등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던 일반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목적이 있었다. 독일 명품 휴고 보스가 디자인한 나치의 군복도 이러한 목적을 지녔다. 그러나 1차 대전 전후로 "전쟁에선 군복 멋있는 쪽이 진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이후 현대에는 화려한 군복은 예복으로, 전투 시엔 보호색을 띤 군복을 입게 된다.

Charles William Vane-Stewart. 1812. oil on canvas. 143.5 X 118.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휴고보스의 나치 친위대 군복

전쟁 개시의 달, 3월


3월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March'는 군대의 '행군'이나 '행진'의 의미로 쓰인다. 이 단어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군신 '마르스 (Mars)'에서 유래하였다. 군대 용어가 유독 3월에 쓰인 이유는 3월에 전쟁을 시작하던 고대의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3월에 시작된 전쟁은 추수를 기점으로 휴전하곤 했다. 날씨가 추워지는 겨울에는 식량과 연료의 부족으로 피차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무리수를 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쟁은 휴전과 종전의 시기를 고려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윌리엄 B.T. 트레고가 그린 <포지 계곡으로 행군하는 미국 독립군>에는 한겨울에도 지속된 전쟁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포지 계곡(Valley Forge)은 펜실베이니아 주에 위치한, 미국 독립전쟁(1777-1778년)중 미 독립군이 주둔한 곳이다. 한겨울 포지 계곡의 추위는 매서웠다. 그 당시 워싱턴의 군사들은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닌, 추위와 굶주림으로 전사했다.

The March to Valley Forge, December 19,1777, William Trego,1883

기후를 이용한 전쟁


과거 기후는 전쟁에서 승패를 가르는 요인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 후반에 벌어진 '아쟁쿠르(Agincourt) 전투'가 있다. 프랑스군 3만여 명이 퇴각 중이던 영국군 6000여 명을 추격하던 중 소나기가 내렸다. 비가 그치고 해가 뜨자 땅은 진흙탕이 되어 기병대는 진흙 속에서 허우적 대었고 한낮 무더위 속에서 프랑스군은 참패한다. 우리나라의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 전투'나 영국군과 인도의 '플라시(Plassey) 전투', 나폴레옹의 '워털루(Waterloo) 전투' 등도 기후로 인해 승패가 결정되었다. 1946년경에는 미국이 인공 강우 기술을 개발하면서 기후 무기 음모론이 등장하였다. 기후조절로 인공강우를 형성하는 기술이 나날이 발전해온 것에 더해 인위적인 가뭄과 태풍, 지진을 일으키게 될 가능성도 있어 이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Battle of Waterloo 1815, William Sadler


전쟁의 희생자, 나팔수


폴란드 옛 수도 크라쿠프시의 광장에 가면 '헤이날(여명)'이라는 나팔소리 곡이 매 시간 성모 마리아 대성당 첨탑에서 울려 퍼진다. 그런데 이 곡은 중간에 갑자기 부자연스레 끊기며 끝난다. 몽골군이 크라쿠프를 침공했던 1241년, 숨이 끊길 때까지 나팔을 불어 위험을 알린 나팔수를 추모하기 위함이다. 원래 크라쿠프는 바르샤바 이전의 수도였다. 그러나 이 도시는 1241년 바투가 이끄는 몽골군의 침공으로 잿더미가 되었고, 폴란드 서부 지역으로 모인 동유럽 연합군과 몽골군은 레그니차(Legnica)에서 격돌하며 동유럽 연합군은 처참히 패배했다. 그러나 오코타이 칸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을 접한 몽골군은 서진을 멈추고 몽골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대로 멈추지 않고 진격했다면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 전체가 위태로웠을 수도 있었던 아찔한 시간이었다.


빈사의 사자상(Lion of Lucerne)


스위스에서 용병 산업이 주를 이루게 된 것은 스위스가 알프스로 둘러싸인 산악 국가로 다른 사업이 발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스위스 용병은 긴 창을 종렬로 세우고 전멸전을 펼치기로 유명해 다른 나라 군대들에게 공포감을 줄 정도였다. 이들은 고용주에 대해 목숨 바친 충성을 보임으로 돈 때문에 모집된 용병에게는 충성심을 기대할 수 없다고 여기던 당시 용병에 대한 선입견을 무색게 했다. 1503년 스위스 용병대는 교황청과 처음 계약을 맺는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근위병 200명 파견을 요구한 이후, 1506년 바티칸에서 '교회 자유의 수호자'로 활약했다. 1527년 신성 로마제국 카를 5세가 로마를 공격할 때, 스위스 근위대는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목숨을 다해 경호한다. 그 결과 근위대 전원이 사망했고, 교황청은 이후 스위스 근위대에게만 경호를 맡기게 된다. 그 후로 500년이 흘러 지금까지 스위스 용병이 교황청 근위를 맡는다. 스위스 용병들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에도 자신들의 고용주 부르봉 왕가 루이 16세를 지키기 위해 프랑스 혁명군과 싸우다 768명이 전사한다. 스위스 루체른에는 프랑스에서 전사한 용병들을 기리기 위해 조각된 빈사의 사자상이 있어 그들을 추모한다. 1차 대전 후 스위스 용병 활동을 스위스 정부에서 완전히 금지하기 전까지 이러한 용병 수출은 계속되었다.

마크 트웨인이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작품"이라고 극찬한 빈사의 사자상, 베르텔 토르발센



저자는 전쟁에서 필요했던 물건들과 또 그에 얽힌 다양한 사연들, 그리고 명화 속에 나타난 역사적 사실들을 함께 살펴봄으로 추상적이고 피상적으로 다가오는 전쟁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전쟁을 소재로 한 그림이 그려진 이유는 다양했을 것이다. 지도층이 전쟁 정당화와 선동의 도구로 그림을 사용했을 수도 있고 또는 화가 개인이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남겼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 그림이 남겨졌건 전쟁을 소재로 그려진 그림은 참혹하다. 전쟁 후에 남겨지는 것은 이름도 모른 채 역사에서 사라지는, 누군가에겐 아들이요, 남편이요, 아빠들, 그리고 수많은 죽음들이다. 책을 읽으며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과연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전쟁이 현재 진행 중인 나라들 가운데 전쟁은 그치고 평화의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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