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학교 친구들과 볼링을 치고 온 아들이 기세 등등했다. 초등학생 시절 아빠와 함께 볼링장을 가서 아빠에게 폼을 배운 이후에 처음 간 것인데 생각보다 점수가 높게 나왔단다. 상대팀과 음료수 내기를 했는데 음료수를 얻어먹은 일등 공신이 되었다고 한껏 자신의 공력을 자랑했다. 저 허세는 누굴 닮은 건지.. 그러고는 아들은 쉬는 날 우리 가족 다 함께 볼링 한 번 치러 가자고 제안했다.
"그래. 볼링 같이 치는 게 뭐가 어렵겠니."라고 말은 했으나 나는 볼링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볼링은 결혼 전 청년시절에 몇 번 친 기억이 다다. 그 시절 갈지 자로 휘청대며 공을 굴리면 바로 또랑으로 굴러가던 공 덕분에 핀을 쓰러뜨린 개수는 가뭄에 나는 콩 수준이었다. 내가 볼링공을 든 건지 볼링공이 나를 이끌었는지. 7파운드짜리 공을 한 팔로 들 수 없었던 그때 그 시절. 내 팔은 공의 무게를 견디기엔 너무 가녀렸고 공은 내 팔의 힘에 비해 너무 무거웠다. 7파운드가 3.18kg이라고 하니 그리 무거운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아들이 날 때 3kg이 좀 넘었었으니 나는 들지도 못하던 볼링공 무게만 한 아들을 안고 키웠던 거였다. 아이들을 키우며 팔은 점점 두꺼워졌을 뿐 아니라 날렵하던 몸도 둥글둥글해진 지금은 그때 같진 않을 거였다. '7파운드 볼링공쯤이야. 한 번 가 보지 뭐.' 엄마가 볼링핀을 좀 맞춰야 체면이 좀 서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과감히 내려놓고. '아들, 네가 기쁘다면 엄마가 뭘 못해주겠니. 맘껏 망가져 주마.' 하고 모처럼 쉬는 날 아이들과 함께 볼링장에 갔다.
옆 라인은 온 가족이 볼링 선수들이었는지, 여자들은 운동선수들 입는 짧은 치마며 팔목 보호대를 하고 있었고 공도 개인 공인 듯 남달라 보였다. 거기다 공을 굴리기만 하면 모든 핀을 다 쓰러뜨리는 팀이었다. 우리 가족은 엄마 아빠가 아이들과 함께 볼링장에 가 본 적이 없으니 아이들도 볼링장은 낯선지 옆의 팀만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관객 모드로 옆의 팀 하는 것만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나 우리 라인도 점수판이 켜지고 핀이 내려와 공을 굴려야 할 때가 되었다.
아빠가 유일한 우리 가족의 선생님. 아빠의 지도하에 우선 폼을 익힌 아이들은 가녀린 팔에 어울리지 않는 무거워 보이는 공을 들고 몸이 균형을 맞추지 못해 기우뚱 거리며 걸어가길 몇 걸음. 공은 언제 굴려야 하는지 박자는 안 맞고, 야심 차게 목표점을 향해 공을 굴렸으나 또랑으로 빠지길 몇 번. 그래도 애들이 요래조래 흉내 내며 공을 굴리다 보니 어떤 때는 스트라이크도 나오고 어떤 때는 스페어 처리도 하고. 그런데 정작 볼링을 치러 다 함께 가자고 했던 아들은 신발이 미끄러운지 계속 미끄러지고 공도 또랑으로 자꾸 빠지고. 볼링 두 게임에 실패가 많으니 마음이 점점 의기소침해지는 것이 보였다.
아들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반대로 전혀 기대감 없이 간 볼링장에서 나는 의외의 성적을 거뒀다. 이젠 7파운드 무게도 그런대로 들만했고 목표점을 바라보며 공을 굴릴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아이를 키우며 튼튼해진 팔과 몸은 볼링을 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길러 주었나 보다. 내가 아이들을 기른다 생각했는데 아이들이 나를 길러 준 격이다. 엄마는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존재이지만 아이들은 엄마가 엄마 되도록 기르는 존재다. 엄마와 아이들은 상호 보완적 관계랄까.
하여간 그날 아들로 인해 볼링을 치게 된 우리 가족은 이후에도 종종 가족끼리 볼링을 치러 가게 되었다. 나는 점점 더 볼링이 좋아진다. 공에 맞아 핀이 쓰러지는 소리도 경쾌하고 핀에 공이 맞으면 목표하던 것을 맞췄다는 쾌감도 느껴진다. 무엇보다 볼링 값 계산하러 갔던 남편이 해준 이야기가 나로 자꾸 볼링장에 가고 싶어 지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계산하던 볼링장 언니가 멀리 있던 나를 학생인 줄 알고 가격을 학생가로 해 주려고 했었다는 이야기는 믿거나 말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