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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ray Dec 28. 2021

배추가 내게 말을 걸어올 때

일상 에세이

첫 아이를 낳은 후, '엄마라면 김치는 혼자 담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하며 김장을 계획했다. 그런데 그때 나는 배추를 씻어서 소금을 뿌려야 하는 줄 알고 있었을 정도로 김치에 문외한이었다. 손윗 언니가 셋이나 있던 친정 엄마는 이모들이 해 주시는 김치를 얻어 드셨다. 엄마는 자신이 담지 않아도 넘치는 김치 덕분에 직접 김치 담는 것을 즐기지 않으셨다. 오죽하면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의 유언이 "OO아, 김치 담아 먹어라"였을까. 엄마가 김치 담기를 즐기지 않으셨으니, 딸인 나도 김치 담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하고 자랐다. 그러니 김치는 내게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요리의 영역일 뿐이었다.


요즘은 유튜브에 김치  재료와 배추를 쪼개고 절이고 씻는 방법까지 자세히 알려 주시는 분들이 많다. 그중에서 취향껏 골라 분량의 재료를 준비하고 담으면 된다. 그러나  신혼시절 때만 해도 김치 담기에 관한 자료가 많지 않았다. 다행히 우리 시어머님은 김치의 달인이시다. 재료를 많이 넣지도 않으시는데, 시원하고 맛있다. 어머님께서 담는 김치는 참 쉬워 보였다. 김장을 계획하고 어머님께 전화를 해서 어떻게 하면 된다는 것을 자세히 물어 메모한 종이 한 장이 내 김치의 레시피였다.


처음 김장하던 날, 김치의 노하우를 전화 너머로 배운 며느리는 어머님의 지혜를 말로만 듣고 따라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갓을 넣으라는 어머님 말씀에 갓을 사 왔는데, 사온 갓이 바로 돌산 갓이었다는. 지금은 생각만 해도 어이가 없고 헛웃음이 나오지만 그때는 시장에서 '이게 갓이요' 하면 아무 풀뿌리라도 샀을 정도로 무지했었다. 또 소금은 도대체 얼마나 뿌려야 하는지, 배추를 소금에 절이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지 명확한 기준이 내 안에 없었다. 그렇게 담았던 그때 그 김치는 내 인생 흑역사 중 하나가 되었다. 배추가 하나도 안 절여졌고, 풀은 도배를 해도 될 만큼 많이 쑤어 놓고, 거기에 고춧가루를 덜 넣어 백김치도, 물김치도 아닌 허여 멀 건한 색깔을 띠고 있었으니, 맛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 후로도 김치는 내게 많은 부담감을 안겨주는 것이었던 것은 두말할 것 없다. 아이들은 자라고 어머님은 연로하셔서 더 이상 김치를 담아주실 수 없을 때까지 김치를 얻어먹던 나는 홀로 서야 했고 김치 담기를 다시 시도했다. 그리고 어찌어찌 김치를 그때부터 담아 먹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1년에 한 번씩 김치를 담는다. 우리 어머님 세대의 어르신들은 김치 담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그렇지만 김치는 아직도 내게 너무 먼 당신이다.



김치 냉장고는 김치를 넣으려고 산 물건이다. 그런데 김치가 다 떨어져 갈 때 즈음, 김치냉장고는 우리 집에 냉장고가 두 개인 듯한 역할을 해낸다. 신선하게 보관해야 할 고기류나 국물용 멸치, 농사지었다고 지인에게 선물 받은 들깨, 떡 만들려고 마트에서 산 대형 찹쌀가루 등을 김치 냉장고에 가득 채우고 나면, 그것만으로도 마음 한 가득 풍요로와지고 안 먹어도 배 부른 때가 있다.


그러나 마음 한 가득 부담감도 몰려온다. 김치가 다 떨어진다는 것은 더 이상 김치찌개를 끓여 먹을 김치가 없다는 것이며, 김치 없이는 살아도 김치찌개 없이는 못 사는 우리 집 아이들을 위해 김치를 다시 담을 때가 돌아왔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부담감이 몰려올 때 마트 한편에 가지런히 쌓인 배추는 피하고만 싶은 물건일 뿐이다. 그러나 배추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내가 필요할 텐데.. "


그 소리를 애써 외면하다가 마음을 다잡고 배추의 목소리를 받아들이는 날. 그날이 바로 우리 집 김장 날이다. 마트에서 사 온 배추가 소금에 절여지는 동안, 나는 속을 만들며 바삐 움직여 할 일을 끝낸다. 그러면 1년 동안은 다시 김치 담을 일 없는 자유의 몸이 된다. 언젠가 아이들이 자라 김치 담는 법을 물어본다면 나는 이제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지 조금은 알려 줄 거리들이 생겼다. 그때는 아마 식생활이 많이 변해 김치를 안 먹게 되려나. 잘 모르겠다. 벌써 우리 집 한 명은 김치 가루(고춧가루)가 싫어서 김치를 안 먹는다는 아이도 있다. 내가 세월을 겪으며 쌓아온 지식들이 아이들 세대에는 쓸모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이 마음 한 켠으로는 슬퍼지기도 한다. 그래도 뭐 이러나저러나 엄마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것들이 많지만, 그중 '나는 김치 담는 엄마'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마음 뿌듯하다. 그게 오늘도 어깨를 주무르며 '김장 후유증이 아무리 심하다 해도 마음만 뿌듯하면 그만이지.'라고 속으로 말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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