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세 살이 될 때까지 우리 집을 지배한 것은 파란색 꼬마 버스 '타요'와 파란 꼬마 펭귄 '뽀로로'였다.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 타요와 뽀로로는 나의 이성과 감성 모두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단어 중 하나였으며, 아들이 아내의 뱃속에 있을 때조차 미래의 내가 이들을 수고로이 찾아 헤메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근본 없이 넘치는 육아 자신감이 도리어 그 둘을 낮추어 보기까지 했다. 식당에서 뽀로로 동영상을 틀어주는 부모는 아이에 대한 애정이 부족한 거라는 해괴한 편견과 함께.
물론, 그 근본 없는 편견과 육아 자신감이 모래알처럼 바스러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출산 첫 해, 바닥까지 떨어진 체력으로 아이 돌보기에 지친 아내가 우연히 틀어 준 타요 애니메이션이 시작이었다. 제작사에서 영상 안에 뭔가 심어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만큼, 아들은 다른 애니메이션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타요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아들의 열광을 외면할 수 없었던 인내심 약한 아빠가 불난 집에 기름 붓듯 타요 미니카며 그림책이니를 사다 바치니 아들의 타요 사랑은 더욱 강고해졌다. 키즈까페는 무조건 타요 키즈까페를 가야했고, 생일 선물과 크리스마스 선물은 무조건 타요 장난감이어야 할 정도로 세상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찐사랑이었다. 물론 타요에 대한 애정은 곧 자연스레 뽀로로에게까지 똑같이 이어졌으니, 이 두 파란 창조물에 들인 돈을 따지자면 집 한 채나 차 한 대는 못사더라도 집 안에 80인치급 대형 TV를 들일 정도는 되리라.
그래도 타요와 뽀로로를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다. 그 둘이 영상에서 읆어준 숫자며 한글이며 알파벳 덕분에 아들이 또래들보다 말도, 글자도 빨리 익힐 수 있었으니. 그 둘이 아들의 시선을 붙잡아 준 동안, 나도 아내도 간신히 집안일을 끝낼 수 있었으니. 솔직히 털어놓자면, 그 둘이 없었다면 아들이 태어난 후 처음 몇 해 동안을 어찌 보냈을 지 상상하기 어렵다.
... 일단 그렇다고 해둬야, 우리가 타요와 뽀로로에게 상납(?)한 돈이 정당화 될 수 있으리라.
아직까지 집에 남아있는 타요와 뽀로로의 흔적들. 이 외에도 타요 그림책, 색칠공부 등 수십 여권의 책들도 파란 버스와 펭귄의 부의 증식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아들의 변심은 순식간에, 그것도 매우 돌연히 찾아왔다.
"아빠 ! 이거 싫어, 싫다고 ~ !"
"엥 ? 동글아, 이건 타요의 새로운 이야기인데 안 볼꺼야 ?"
"아니야 ~ 어서 다른 거 보여줘 ~"
아들은 만으로 꽉 찬 세 살이 된 순간부터 타요 애니메이션을 보여주면 대성통곡을 할 만큼 갑작스레 타요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6개월 뒤, 이번에도 똑같은 반응과 함께 뽀로로에서 멀어져갔다. 아들은 케이블 TV 채널에서 새로 방영을 시작한 타요와 뽀로로의 신규 시즌과 극장판을 격하게 거부했다.
"동글아, 왜 갑자기 타요가 싫어진거야 ? 너 타요 엄청 좋아했잖아 ?"
"이젠 아니야 ~"
아들은 특별한 이유도 이야기해 주지 않고 거실을 데굴데굴 가로질러 굴러가더니만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거 참, 요즘은 사춘기가 네 살 때 오는 거라 사춘기라고 한다더니.
뭐, 이유야 어찌됐던 아들의 외면을 받은 타요와 뽀로로는 더 이상 우리 집 안에서 발 붙일 곳이 없었다. 장난감 상자의 가장 구석진 곳이 타요 미니카의 차지가 되었고, 아들의 실내 놀이터였던 타요 미끄럼틀은 본래의 쓰임을 잃고 장난감 창고로 전락했다. 수시로 거실을 어지럽히던 뽀로로 소꿉놀이가 한 달에 한 번 정도 등장하며 간신히 과거의 명맥을 이을 뿐, 파란 버스와 펭귄의 전성시대는 그렇게 서서히 황혼 속으로 저물어 갔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언젠가는 찾아올 날이긴 했지만 너무 갑작스러워 혼란스러웠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하루 아침에 이렇게 취향이 바뀔 수도 있는걸까 ? 혹여 아들의 성정에 의학적인 문제라도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이것 저것 찾아보았지만 전혀 짚히는 바가 없었다. 난생 처음 마주한 난제의 답은 아들 만이 갖고 있었지만, 이리 저리 돌려 물어봐도 그냥 싫다는 대답 말고는 마땅한 수확이 없었다.
그동안 타요와 뽀로로에 투자한 돈이 얼만데 이렇게 삽시간에 무용지물이 될 줄이야. 작은 산을 이룬 타요와 뽀로로 장난감을 폐기처분하고 바뀐 너의 취향에 맞춰 새 장난감을 사야 하는거니. 새 시즌이 시작된다고 해서 IPTV에서 뽀로로랑 타요 채널도 구독신청했는데. 집 한 구석에서 마치 폐차된 것처럼 서 있는 타요 미끄럼틀의 뒷모습은, 마치 신곡이 실패한 바람에 등 떠밀려 은퇴한 아이돌마냥 쓸쓸해 보였다.
이제는 장난감 창고가 되어버린 타요 미끄럼틀. 집에 아들 친구들이나 조카들이 놀러오면 가끔 부활하긴 한다. 물론 '타요'로써가 아니라 그저 '미끄럼틀'로.
난제는 의외의 방법으로 풀렸다.
"아빠, 포켓몬스터 알아요 ?"
"응, 알지. 아빠가 어릴 때도 포켓몬스터가 있었어."
"포켓몬스터에서 피카츄가 나오는데, 강력한 전기를 내뿜어요 ! 빠지지지직 ~"
만 네 살이 된 후 서너달 정도 지나서였을까. 아들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어린이집에 다녀오면 전기 스파크 내뿜는 소리를 내며 포켓몬스터의 피카츄를 찾기 시작했다. 포켓몬스터 만화를 보여준 적이 없었고, 혹여라도 채널을 돌리다가 포켓몬스터 만화가 방영되면 빨리 채널 돌리라며 성화였던 아들이었다. 어린이집에서 포켓몬스터를 좋아하는 친구와 죽이 맞아 놀기라도 했던 걸까. 아들의 갑작스러운 피카츄 사랑이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동글아, 너 텔레비전에서 포켓몬스터 만화 나오면 빨리 다른데 돌리라고 했잖아. 근데 왜 갑자기 피카츄가 좋아졌어 ?"
"헤헤헤..."
아들은 히죽히죽 거리며 웃기만 할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질 않는다. 타요와 뽀로로가 간 뒤 이번엔 피카츄인가. 아직 장난감 상자에 쌓여있는 그 둘의 흔적을 지우지 못했건만. 또 다른 장난감 군단을 집안에 들여야 하는 건지 걱정하는 아빠의 착잡한 속사정은 아랑곳 않고, 아들은 '피카 피카' 거리는 피카츄 소리 흉내를 내며 온 거실을 뛰어다녔다. 그 모습에 깊은 체념의 한숨이 푹 나왔다.
그래, 이제 피카츄의 시대가 왔으니 순응할 수 밖에. 라떼는 은하철도999 다음에 메칸더V였었지. 모든 시절엔 그 시절의 아이돌이 있을 뿐이야. 뇌수 깊은 곳 옛적 만화영화들의 역사들을 위안 삼으며, 아들을 소파에 앉혀놓고 무심히 '포켓몬고' 게임을 다운 받았다. '포켓몬고'에서는 아들이 좋아하는 피카츄 캐릭터를 증강현실로 보여줄 수 있었고, 여러가지 포켓몬스터를 직접 잡아볼 수도 있었다. 그래, 기왕 좋아할 거라면 그냥 아빠와 함께 즐겨보자. 이것도 언젠가는 추억이 되겠지.
그리기, 만들기, 색칠공부까지 점령해 버린 피카츄. 이 단계에 이르면 이제 찐사랑이라고 인정해 줘야 한다.
포켓몬고를 실행하고 몇 가지 기능을 보여주니, 예상대로 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때, 우리 주변에 피카츄와 다른 포켓몬스터 몇 마리가 나타났다. 아들은 빨리 피카츄부터 잡아야 한다고 난리가 났다.
"동글아, 여기 있는 이 포켓몬스터가 피카츄보다 강력한 거 같아 ! 이거부터 잡자 !"
"아니야 ! 피카츄 잡을꺼야 !"
아들은 완강히 피카츄를 원하고 있었다. 그래, 서양에 미키마우스가 있다면 동양에는 피카츄가 있다더라. 아이돌 그룹에서도 센터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당연지사이듯, 포켓몬스터 중에서도 물론 피카츄가 먼저 눈에 들어오겠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아들의 요구에, 일단은 피카츄 한 마리를 잡아놓았다. 그리고 이제, 주변의 남은 포켓몬스터들을 잡으려던 순간.
"아니야 ! 다른 건 안잡을꺼야 !"
아들은 다른 포켓몬스터를 포획하려던 나의 손을 붙잡아 멈췄다.
"동글아, 이건 포켓몬스터 여러 마리를 잡아서 강력하게 키우고 다른 사람들의 포켓몬스터와 시합을 하는 게임이야. 피카츄 말고도 다른 포켓몬스터들도 엄청 많은데 얼른 잡아야지 ?"
"아니야 ~ 다른 건 안 귀엽잖아 !"
"뭐 ? 그럼 안 귀여워서 다른 건 안잡겠다고 ?"
전혀 예기치 않았던 아들의 대답으로 어안이 벙벙해진 아빠가 되묻자, 아들은 잘 들어두라는 듯 자신의 의견을 좀 더 정확히 피력했다.
"응. 난 귀여운 게 좋단 말이야."
아들이 포획(?)한 피카츄와의 즐거운 한 때. 포켓몬고의 증강현실 기능을 이용하였다.
그랬다. 생각해 보니 아들은 타요와 뽀로로에서 멀어질 즈음에 스누피며, 라이언 같은 다른 캐릭터들에 관심을 보였다. 그 때는 그냥 '그래, 이런 애들도 있단다'라는 느낌으로 알려주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 캐릭터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귀엽다'라는 것.
시대를 매료시킨 귀여움으로 전 세계 캐릭터 상품 시장을 '평정'하고 있는 스누피와 라이언에게 타요나 뽀로로는 대거리가 될 리 없었다. 아들이 타요와 뽀로로를 외면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아들이 그저 성장의 과정에서 '귀여움'이라는 하나의 미적 요소에 새롭게 눈을 뜬 신호였을 뿐. 아들의 취향이 좀 더 다양해 진 것이니 걱정할 일도 캐물을 일도 아닌데, 아빠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변화에 그저 놀라서 허둥대고 만 것이다.
그 날, 아들의 저녁식탁 앞에 앉아 수저질을 하는 아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들의 손에는 뽀로로 포크와 패티 숟가락이 들려 있었다. 두 살 무렵부터 아들의 식탁을 점유해 왔던 그 수저들이 이제 아들의 손아귀에 비해 확연히 작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숟가락과 포크는 그대로이지만, 아들이 훌쩍 자란 것이겠지.
얼굴 여기 저기가 긁히고 벗겨진 뽀로로와 패티 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포크 손잡이에서 활짝 웃고 있던 뽀로로와 패티도 시간의 흐름이 흔적으로 남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나 보다. 치열한 육아전쟁에서 살아남은 노병 같은 그 모습에, 순간 숙연함과 고마움을 느낀다. 힘들었지만 세상 예쁜 아들을 만나 새로운 인생에 눈 뜬 그 시간들은 타요 대위와 뽀로로 상사, 패티 병장이 없었더라면 쉬이 오를 수 없었던 고지였으리라.
"동글아, 이제 뽀로로 포크랑 패티 숟가락이 동글이 손에는 많이 작지 ?"
"응. 숟가락이 작으니까 밥을 뜰 때 힘이 잘 안들어가."
"그래. 그동안 뽀로로랑 패티도 동글이 밥 먹여주느라 엄청 열심히 일했으니까 쉬라고 하자. 아빠가 스누피 숟가락이랑 젓가락 새로 사올께."
"야호 ! 근데 피카츄 숟가락은 없어 ? 나 피카츄 좋은데."
"알았어 이놈아. 아빠가 한 번 찾아볼께. 근데 없으면 그냥 스누피 숟가락이다."
"네 ~"
타요, 뽀로로, 그동안 수고 많았어. 우리 아들도 이제 너희를 떠날 때가 온 건가봐. 수많은 아이들이 쑥쑥 자라며 너희를 만나고 또 떠나갔을테니, 너희에겐 아마 이번에도 그런 일상 같은 작별이겠지. 하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함께한 전우 같은 너희를 추억 한 켠으로 묻어두는 오늘, 그래도 한 가지 확신을 가지고 너희를 떠나보낸다. 어디선가 너희 둘을 볼 때마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을 많이 그리워할 거라는 거.
안녕 타요, 그리고 뽀로로.
Good bye, the day we lo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