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아들의 연애편지

꼬마의 예쁜 사랑 이야기는 아니랍니다.

by 게으르니스트

요즘이야 넷플릭스의 K드라마가 장르물을 천하제패했다지만, 시청률 40%를 넘나들던 '라떼'의 국민 드라마들은 죄다 로맨스물 투성이였다. (물론, 기억상실, 배다른 남매의 사랑, 재벌가와의 결혼, 폭행 사주, 주주총회 엎어버리기 등 평범한 로맨스가 아니었음은 기본이다.)


그 드라마들의 남녀 주인공이 서로의 집안에 인사를 올릴 때면 그 부모들은 항상 서로의 집안을 따져대곤 했다. 집안은 잘 사는지, 부모는 뭘 하는 사람인지 등등.


둘이 좋다면 일단 그 본인을 좀 더 알아보고 나서 따져도 될 것을 그 부모들은 왜 그렇게 집안부터 따져대는지. 아무리 드라마 속 인물들이지만 속물도 그런 속물이 없다며 국민적 공분을 사는 악역 캐릭터가 되곤 했는데, 얼마 전 그네들이 왜 그런 캐릭터가 되어야 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아뿔사, 내가 그 악역 캐릭터와 공감대를 나누게 될 줄이야.


물론, 그런 닳고 닳은 속물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PG81685353_w640_h360.jpg 글의 내용과는 무관합니다. 점 하나로 K-막장 드라마의 한 획을 그으신 '아내의 유혹'.




어느 날 아들내미가 방과후 교실을 다녀와서는 가방을 열더니 반쪽으로 접힌 A4 종이를 꺼냈다. 수업시간에 뭔가 그렸거나 문제풀이를 해왔겠거니 싶어 들여다보니, 이게 왠걸. 방과후교실을 함께 다니는 친구가 쓴 손편지였다. 편지의 주인공은 몇 개월간 같은 반에서 함께 수업을 받은 여자친구 A양이었다. A양은 항상 예쁜 드레스 차림으로 귀여운 유니콘 인형을 품에 안고 오는 차분한 성격의 친구였다. 이사를 가게 되어 이제 더 이상 만나기 어렵게 되었다고 전해들었는데, 아들에게 작별 편지를 쓴 것이었다.


한 쪽에는 아들과 A양인 것이 분명한 왕자님과 공주님이 손을 꼭 잡고 서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귀여움이 뚝뚝 묻어나는 편지 본문이 쓰여 있었다. '사랑해', '보고 싶을꺼야'라는 단어를 네 살 꼬마의 편지에서 보게 되니 절로 함박 미소가 지어졌다. 편지에는 싸인펜으로 알록달록 예쁘게 꾸미고, 한 글자 한 글자 정성들여 쓴 흔적이 역력했다. 그렇지만 편지의 내용이나 그림보다도, 이제 아들과 헤어지게 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편지로 전달하고자 한 A양의 그 따뜻한 마음이 고마웠고, 또 한편으로는 나이에 비해 성숙한 마음가짐이 참으로 놀라웠다.


14-3.jpg 왕관에는 반짝이는 보석 스티커도 붙여준 정말로 예쁜 편지. 왕자님 공주님 그림이 정말 귀엽다.


그것은 '요즘 아이들은 너무 빨라, 되바라졌어'라는 식의 놀라움이 아니었다. 유아가 친구와의 지속적인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드문 일로 알고 있었는데¹, A양은 우리 아들과 앞으로 만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애틋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것은 A양이 천성적으로 다정다감한 친구여서일 지도 몰랐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 마음과 타고난 성격을 이해해 주고 북돋아주는 부모의 뒷받침이 없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아마도, A양은 인생에서 좋은 우정의 의미를 잘 알고 귀하게 여기도록 가르치는 그런 가정에서 자라고 있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아들이 받아온 A양의 편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한참 동안 그 가족에 대한 궁금증이 절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A양의 가정은 어떤 분위기일까. 그 부모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아이를 키우고 있을까. 앞으로 교육은 어떤 식으로 하려고 하고 있을까. 아이랑 주말에 놀러가면 어디로 놀러가는 게 가장 좋았을까. 부모로써 요즘 무슨 고민을 하고 있을까. 가족의 인생계획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당연히 그것은 '우리 아들과 A양이 장래를 바라보는 무슨 관계 같은 것을 지속했다면 어떨까'와 같은 허튼 상상에서 나온 궁금증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바램 때문이었다. 아들이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가져온, 좋은 영향력을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선한 마음을 가진 가족과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산다면 어떨까 하는 바램.


험하고 거칠지만, 한편으로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 그런 이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아들에게 전해주고 싶었고, 아들이 자라는 동안 그런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다. 바로 그 따뜻한 마음이 A양의 편지에 담긴 우정에의 애틋함에서 묻어 나왔기에, 저절로 A양의 가정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진 것이다.


아들의 친구를 보니, 그 건너에 있는 그 아이의 부모가 저절로 궁금해 지고, 그 가정과 가풍이 자연스레 궁금해 지는 것이 이토록 당연한 사고의 수순일 줄이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정의할 때 '그 사람만 봐야지, 왜 다른 게 궁금해'라는 말이 지극한 상식인 줄로만 알았는데, 내 아이의 관계를 마주하니 그게 그렇지 않더라는 것을 A양의 알록달록한 예쁜 편지가 가르쳐 주고 있었다.


pexels-bess-hamiti-35188.jpg Source: Pexels




방과후 교실에 아들을 데리러 가서 A양의 어머니를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아들과 A양에게 쥬스 같은 간단한 간식을 함께 나눠주면서 잠깐 인사를 나눈 것 외에는 특별히 길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그런 자리에는 대부분 아이의 엄마가 오는 경우가 많다보니, 아빠인 나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A양의 어머니도 서로 차근히 대화할 만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리라.


아들에게 물었다.


"동글아, 이제 A 친구는 이사 가서 보기가 어렵게 되었네. 그래서 그 친구가 동글이랑 만나지 못하게 된 게 아쉬워서 편지를 써준 거 같아."


"왜 ? 차 타고 가서 만나면 되잖아 ~"


"어... 그게 아빠가 A 친구의 아빠 엄마한테 편지를 쓸 방법이 없어서, 어디서 만날 지 약속을 잡을 수가 없어."


"아... 아쉽다... A랑 같이 만나서 놀고 싶다 ! 보고 싶다 ~"


아들도 A양을 만날 수 없게 된 것에 대해 못내 섭섭한 눈치였다. 아들과 A양은 수업 시간에 케미가 좋아서, 수업을 마치면 A양도 A양이지만 아들도 항상 기분이 하늘을 찌를 듯 신나 있었다. 항상 친구가 고픈 아들내미이니 그 아쉬운 마음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나도 새삼스레 그 A양의 어머니와 대화를 많이 나눠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다 지나간 것을 이제 와서 어찌할꼬.


순간, 방과후 교실에서 수업 내용과 사진을 전달할 목적으로 운영하던 SNS에 A양의 어머니가 가입되어 있던 것이 문득 생각이 났다.


"동글아. 그럼 아빠가 OO교실 선생님한테 편지를 대신 전달해 달라고 할테니까, A 친구한테 답장을 써볼래 ?"


사실 아이들 사진에 댓글 몇 번 달은 것 말고는 잠잠한 SNS였기 때문에, 그 채널을 통해 답장을 보낸다고 해서 A양의 어머니가 본다는 확신은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뭐 어떤가. 아들에겐 편지를 받으면 답장을 보내야 한다는 걸 알려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혹시나 A양 가족이 편지를 받는다면 좋은 인연이 다시 살아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들은 의외로 흔쾌히 아빠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스케치북 한 장을 뜯어 색연필과 함께 아들에게 건넸다.


14-5.jpg 끝내 직접 전하지는 못한 아들의 답장. A양 편지에 비하면 조금 중구난방이지만, 그래도 아들의 마음을 담뿍 담았다.


아들은 한참 동안 아빠와 함께 스케치북에 편지를 끄적였다. 받았던 편지와 매한가지로, 알록달록 예쁘고 올망졸망 귀여운 마음을 담은 아들의 첫 연애편지 답장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아들의 답장은 사진에 담겨 SNS를 통해 편지의 주인공에게 날아갔다. 편지를 무사히 보냈다는 아빠의 말에, 아들은 이내 기분이 좋아져서 씨익 웃었다.


고백하자면,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그 메시지에는 답장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들로부터 비롯된 (그리고 결국 완성되지는 못했던) 어떤 인연의 실마리가 나에게는 꽤나 긴 여운을 남겼다. 앞으로 우리 아이가 얼마나 많은 새로운 인연의 끈을 우리 가족에게 가져다 줄까 하는, 약간은 막막하지만 굳이 피하고 싶지는 않은 그런 궁금증과 함께.



BandPhoto_2022_01_15_08_44_56.jpg 아들과 A양의 즐거운 수업시간.


요즘은 아이가 하나 아니면 둘인 집이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자연스레 아이들의 친구 관계에 관심이 많아질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저희 집도 아이가 하나이다 보니 아들이 어린이집이나 방과후 교실에서 어떤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지 저절로 관심이 가게 됩니다.

저희는 아들이 밖에 나갈 때는 항상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조금 챙겨가지고 다닙니다. 아들이 친하게 노는 친구가 생기면 그 친구에게 간식을 함께 나눠주며 이야기도 함께 나누구요. 그러다보면 저절로 그 부모님들과도 눈인사도 하게 되고, 저절로 이야기도 나누게 되더라구요.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건 대부분 엄마들이다보니 연락처 교환 같은 건 하기 좀 그렇지만, 만약 엄마들끼리 만난다면, 그리고 성격이 조금은 개방적이시라면, 잘 맞는 '집안'을 찾아 동네 친구 만들기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혹시 아이를 데리고 나온 사람이 저 같은 아빠여도 외면하지 마시고 이야기 나누어 주세요. 아빠가 데리고 나와서 놀고 있으면 엄마들이 말을 안거시니... 해치지 않는데요... 흑.)


동글이에게,

동글이가 나중에 커서 친구 이야기를 아빠 엄마한테 얼마나 많이 할지는 잘 모르겠어. 아빠는 자라는 동안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친구 얘기를 많이 하지 않았거든.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뭔가 나만의 비밀 같은 걸 가지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 때 만났던 학교 친구들을 스스로의 기준으로 재단해서 '부모님한테 이야기하면 혼날 것 같은 친구'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언젠가 동글이가 더 자라서 학교에 다니고, 청소년이 되는 날이 올거야. 그 때 너는 아빠처럼 친구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할 수도 있지. 잘 될지 모르지만, 아빠는 항상 동글이랑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눠보려 해. 그러면 콕 찝어서 친구 이야기가 나오지 않더라도, 아빠가 억지로 친구 이야기를 묻지 않더라도, 저절로 친구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



1) 셀만의 우정 발달 단계, 출처: https://baukuri.tistory.com/1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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