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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르니스트 Jan 16. 2024

매일 30분, 글쓰기 좋은 질문 642

(15) 전 약혼자의 결혼식에서 요리사들을 채광창으로 내려다보며... 

    바스락, 바스락.

    손바닥 안에서 마른 열매의 겉껍질이 조금씩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방에는 아무도 없어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내가 있는 2층 다락방의 둥글고 작은 채광창 너머로 교회의 정원이 내려다 보였다. 정원에는 교회의 정문으로부터 이어진 벽돌길이 있었는데 길 양편으로는 하얀 히야신스로 장식된 오브제가 놓여있었다. 오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맑았다. 적당히 따스하고 농밀한 가을 오후의 햇살이 히야신스의 하얀 꽃잎 위에서 반짝이는 듯 했다. 두어시간 후면 그 순결해 보이는 빛에 둘러쌓인 길을 따라 그녀가 들어올 것이었다. 나는 그 꽃길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원 한켠에서는 대여섯 명의 요리사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대부분은 재료를 손질하고 있었지만, 그 중 하나가 커다란 솥 앞에서 주걱을 열심히 젓고 있었다. 그는 팔뚝을 걷어 붙이고 진지한 표정으로 중간 중간 솥 안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몇 가지의 양념을 넣기도 하면서 스프를 끓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저렇게나 진심을 다해 스프를 만들고 있는데 하필이면 나의 오늘 타겟이 저 스프이니 말이다. 그녀를 포함하여 결혼식에 참석할 하객들은 잠시 후 저 스프를 먹고 복통을 동반한 참을 수 없는 변의(便意)를 느낄 것이다. 그리고 온몸을 둘둘 감싸는 웨딩드레스를 입어 몸이 자유롭지 못한 그녀는 분명 화장실까지 가지도 못한 채 생애 최악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리라. 비록 무신론자이긴 했지만 나는 요리사의 얼굴을 바라보며 성호를 그었다. 만약 절대자가 있다면 그의 요리에 대한 열정에 별도의 보상을 해주었으면 하는 진심 어린 바램과 함께.

    나의 약혼자였던 그녀는 내가 중국의 한 지방에 이년 간 파견 근무를 하는 동안 다른 남자와 결혼 약속을 하고 나에게 일방적으로 파혼을 이메일로 통지했다. 그 지방은 인터넷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 지방의 오지였고, 나는 그녀가 메일을 보낸 후 삼 개월이 지나서야 그녀가 파혼을 알리는 메일을 읽을 수 있었다.




* 어제 마라샹궈를 난생 처음으로 먹었다. 생애 최악의 맛이었다. 왜 이 요리가 한동안 인기를 얻었는지 알 수 없었다. 마라샹궈를 먹은 직후 이 글감을 접했을 때, 전 약혼녀의 결혼식을 망치려는 남자가 중국 어느 지방에서 얻은 열매 (먹으면 설사를 동반하는) 를 가지고 결혼식 피로연을 엉망으로 만드는 장면이 떠올라서 그대로 글로 옮겼다. 코메디가 될지, 뭔가 다른 장르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상상이었다.

* 매일 늘어나는 글감들이 즐겁다. 조금씩 길게 써봐야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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