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고
내가 고등학교 때 문과를 선택한 것은 과학 쪽에 적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수학은 잘하는 편이었고 재미도 있었는데 오히려 물리 과목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사회 과목은 전반적으로 좋아했지만 언어영역 점수가 잘 나오지 않는 바람에 고생을 좀 했다. 문과였지만 '문과적 감성'(이라는 게 정말 존재한다면)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고 이성 중심의 사고방식이 더 편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이미 이때부터 무리하게 문과와 이과, 감성과 이성 등으로 나누는 이분법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이 글에서는 감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과학책인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소개한다. 이 책은 기존에 중시되었던 이성 중심의 사고방식을 과학적 근거에 기반하여 정면으로 반박함으로써 전통적인 감성 대 이성의 대립 구도를 무너뜨리고 있다. 물론 과학적 근거는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절대적인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어디까지나 현재 상황에서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밝혀진 사실이 이렇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 윤리 시간에 처음으로 성선설과 성악설을 들어본 이후 《군주론》, 《국부론》, 《이기적 유전자》 등의 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이 책들을 읽은 건 당연히 아님)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입장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다. 군 입대 전까지만 해도 딱히 인생에 큰 굴곡이 없었기 때문에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었는데, 군대를 다녀오고 회사를 다니면서 왜 이러한 관점이 시대를 뛰어넘어 현재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초창기 넷플릭스를 하드캐리했던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 등에 열광하면서 거의 성악설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런 내 사례가 정확히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가 문제를 제기하는 지점이다. 다윈이 처음 만든 표현으로 알려진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은 인정사정없고 피 말리는 경쟁을 연상시키지만 사실 다윈은 최적자만이 살아남는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최근에는 동물들이 서로 협력하는 모습이 자주 발견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자연이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의 장이라고 믿고 있다.
이 책은 통념과는 다르게 다정함이 생존과 진화에 유리했다는 과학적 증거를 다각도에서 제시한다. 보통 개는 사람이 길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친화력 높은 늑대들이 스스로 가축화를 선택했다는 내용,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자기 가축화를 통해 진화의 승자가 될 수 있었는지 등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책의 뒷부분에서는 이렇게 친화력이 좋은 인간이 어떻게 전쟁, 대량 학살 등을 통해 다른 인간을 잔인한 태도로 대할 수 있는지도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사람들은 어떤 집단이든 자신과 같은 집단에 속해 있는 타인에게만 친절하고 이외의 사람들은 인간으로 보지 않는 비인간화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는 앞부분과는 달리 인간 사회에 대한 통찰이 돋보여서, 유튜버 '겨울서점'이 적절히 지적했듯이 이 책이 단순한 과학 책만은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든 느낌은 일종의 안도감이었다. 성악설에 점점 더 끌리던 시절에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믿고 싶은 마음이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라며 소심한 반항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완전히 경계를 늦추지는 않아야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최대한 다른 사람들에게 다정한 태도로 살아가자는 다짐도 하게 되었다. 잘 쓰인 과학 책 한 권이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에 이렇게까지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이에 더하여 소소하게 놀란 점은 이 책의 저자 이전에 진화 생물학 쪽에서 개에 관한 연구가 없다시피 했다는 사실이다. 이 책 3장에서는 저자인 브라이언 헤어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랐던 반려견 오레오를 통해 개의 친화력에 대해 연구하게 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나는 딱히 동물을 좋아하지는 않는 사람인데도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가슴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 표지 사진 출처: https://www.facilitateurs-alsace.org/2021/05/08/facilitation-covid-19-un-an-ap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