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아홉, 서른, 서른 하나(하)

by 강미아

띠링-

'수민 씨, 안녕하세요? 양재영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나요?'

수민은 자신의 반가운 마음에 놀랐다.

'네, 잘 지냈어요.'

'지난번 바로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괜찮으시면 커피 한잔 괜찮을까요?'

'좋아요.'

수민은 바로 답장을 해버렸다.

갑자기 그에 대해 알고 싶어진 걸까?


수민은 양재영을 두 번 만나고 나서야 왜 엄마가 아무리 싫어도 최소 두 번은 만나라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소개팅 날 너무 긴장해서 자기만 얘기하는 줄 몰랐다며 솔직히 말해주었다. 그리고 라면과 과자 안 먹는 건 진짜라고. 알고 보니 유쾌하고 진솔한 사람이었다. 두 번째의 만남에서 양재영은 수민 성을 둘러싼 가시덤불을 꽤 많이 잘라냈다. 프린스 필립처럼.


벌써 둘이 만난 지 두 달 가까이 되었다. 그럼에도 양재영은 서두르지 않았고 그런 점이 수민은 좋았다. 자신을 아껴주고 존중해주는 느낌이 들었다. 친구 B와 T의 성화에 드디어 연말을 계기로 수민은 친구들에게 그를 보여주었다. 처음에 그는 친구들 앞에서 살짝 떨었지만 술을 같이 마시자 위트 있는 센스남이 되어 B와 T를 즐겁게 해 주었다. 친구들이 즐거워하자 수민도 미소 지었다. 마지막엔 B가 너무 마셨는지 속이 안 좋아 바람 쐬러 나갔는데 한참 오질 않았다. 수민과 T가 걱정을 하자 눈치 있는 양재영이 재빠르게 B를 찾아 택시까지 태워 보내주었다.(게다가 위험할까 택시 번호판까지 찍어서 수민에게 보내주었다.) 수민은 그가 참 단단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 날, T까지 보내고 그와 수민, 단 둘이 남았다. 그는 수민을 데려다주기로 하고 둘이 걷다가 수민의 아파트 단지 앞 공원에 잠시 앉았다. 1월이라 추운 날씨였다. 그는 살며시 수민의 손을 잡았다. 수민은 놀랐지만 손잡기 정도는 싫지 않았다.

"저 수민 씨 좋아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면서 전해졌다.

"아. 네."

"수민 씨는 제가 어떠세요?"

"아... 재영 씨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좋다는 건가요?"

"... 그런 것 같아요."

수민은 어렵게 대답을 했다.

양재영은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수민을 벌겋게 피어오르는 눈빛으로 보더니

곧 자신의 입술을 내밀며 수민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 순간,

수민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돌려 피하고 말았다.

아. 어쩌지...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수민이 말했다.

차마 그의 민망한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집에 들어온 수민은 머릿속으로 아까 그 장면을 돌렸다.

나는 정말로 그가 좋은가?

그래. 그가 좋아.

H오빠를 제외하고 이렇게까지 마음이 가는 남자는 처음이다.

그런데, 왜 스킨십은 안 되는 걸까?

왜...


띠링-

'조심히 잘 들어가셨죠? 남은 주말 잘 보내세요.'

그는 끝까지 젠틀하다.

수민은 문자만 읽고 차마 답장하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양재영과는 그게 끝이었다.

자신의 혼란스러운 마음 때문에 수민은 차마 답장하지 못했고 그 뒤로 그에게 연락이 없었다.

그렇게 수민은 서른다섯이 되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결혼하지 않은 두 친구 B와 T 뿐이었다.

B는 수민의 이야기를 듣고 스킨십도 못하는 사람과 어떻게 결혼하냐며 잘 헤어졌다고 했다.

T는 양재영 인맥의 가지치기를 아쉬워했다.


그 뒤로 수민은 결정사에서 해주는 소개팅을 여럿 했지만 잘 되지 않았고 정해진 횟수를 마무리했다.

시간은 흘러 완연한 봄을 앞두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벚꽃엔딩'이 한창 흘러나오는 계절이었다.


B와 T도 몇 달만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약속 장소에는 T가 먼저 와 있었다.

"수민아, 우리 오래만이다."

"응, 그러게. 우리 연말 모임하고 톡만 했지 이렇게 만나는 건 올해 처음이네. 시간은 왜 이렇게 빠른지. 벌써부터 가속도가 붙는 것 같아."

"응, 아. 오늘 B는 못 나올 거 같아. '

지금 결혼 준비하느라 바쁘거든."

"정말?"

수민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서른다섯의 여자에게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서 듣는 결혼 소식이 이상한 건 아니었다.

"뭔가 서운하지만 축하해줘야겠지?"

수민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청첩장 전해 달래."

T가 예쁜 레이스 무늬가 있는 흰색 봉투를 내밀었다.

"언젠데?"

수민은 청첩장을 가방에 넣으며 T에게 물었다.

"4월 셋째 주 토요일 3시. 청첩장에 다 쓰여 있는데"

"다다음주? 빨리 하네."

"... 청첩장은 안 봐?"

"나중에 볼게. 뭐 청첩장 같은 건 어른들에게 돌리고 남은 거 준거 아니니? 요새는 신랑 신부 사진 넣어서 모바일 돌리던데... 결혼식은 어디서 해?"

"인터컨티넨탈"

"오~ B가 괜찮은 사람 잡았나 봐. 좋은 데서 하네. 오래간만에 호텔식 먹겠어~ 꼭 가야지!"

"수민아.

B가 말이야. 있잖아..."



겉은 레이스 무늬의 흰 봉투.

카드 겉표지는 화이트에 고급스러운 옅은 은색 페이즐리 무늬.

봄에 알맞게 펄 핑크로 Wedding Invitation이라고 쓰여 있다.

카드 안쪽 왼편에는

이름이.

양. 재. 영.

이라고 적혀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와 이름이 똑같네.

수민은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수민아, 사실 그래서 B가 못 나오겠데. 그게 어쩌다가... 둘이 엮여서... 아! 그럼 당연히 너랑 헤어지고 나서지. 연락처? 아, 그때 B가 술 취하고 택시 태워 보낼 때 혹시 무슨 일 있을까 봐 택시 기사 보는 앞에서 재영 씨가 휴대폰 번호 물어봐서 저장해놨더라구...그런 거 아니래... 너랑 헤어지고... 뭐? 그게 헤어진 거지 왜 아니야? 잠수 이별이었잖아. 어쨌든 그러고 재영 씨가 너무 힘들어서 B한테 전화했었나 봐. 아이, 위로받으려는 게 아니라 니 마음이 어떤지 물어보려고. B가 왜 너한테 얘기 안했나고? 수민이 너 그 때 재영 씨 남자로서 싫다고 했잖아. 어머 얘는 뭐가 다르니? 남자랑 스킨십 싫다는 게 바로 그 말이지... 너 왜 이렇게 흥분했어? 네가 재영씨 싫다 했잖아. 물론 남들이 보기에는 좀 그럴 수 있지. B도 많이 고민한거 같더라구... 하지만 너 발끈하는 것도 좀 웃기다. 넌 우리보다 두 달 만난 남자가 더 중요하니? 그리고 너랑 재영씨랑 사귄 것도 아니었잖아. 15년 지기 친구가 결혼한다는데 웬만하면 축하해줘..."


둘이 사귀지도 않았는데 잠수 이별이라니.

T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알까?


물론 수민도 안다.

B의 결혼 소식에 재영 씨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다는 거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걸.

이런 게 나 갖긴 싫고 남 주긴 아깝다는 건가?

나 진짜 나쁜 년이네.


무언가 내 것을 빼앗긴 느낌.

그런데 그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수민은 갑자기 너무 서러워서 엉엉 눈물이 났다.

B보다는 재영 씨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수민은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고 그 날의 그 공원 벤치에 앉았다.

봄 바람이 아직 쌀쌀했다.

연락처를 찾아보니 아직 그의 전화번호를 지우지 않았다.

양재영.

그의 이름 아래에 있는 초록색 통화 버튼을 드래그했다.


뚜르르르...

0:01...

"이수민 씨?"

단단한 남자의 저음이다.

방금 또 깨달은 것.

그의 목소리가 참 좋다.

"재영 씨. 오랜만이에요."

수민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저. 소식 들으시고 연락 주신 거죠?"

양재영은 의외로 덤덤한 듯 하다.

"네, 친구들이랑은 서로 바빠서 그동안 못 만났었거든요. 그 새 그런 일이 있었네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축하드려요. 그냥... 제가 궁금한 거 여쭤봐도 될까요?"

"네... 뭐"

"저 그날 있잖아요. 우리 마지막 만난 날... 기억하세요?"

"그럼요."

"저...혹시 B와 무슨 일 있었나요?"

"수민 씨,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그때 저 정말 수민 씨 좋아했습니다. 오죽하면 처음 본 B 씨에게 연애 상담까지 받았어요."

"어...언제요?"

"택시 기다리면서요. 오히려 B 씨가 수민 씨와 저와 분위기 너무 좋다고 둘이 진도 나가보라고 충고까지..."

"말 끊어서 죄송한데 잠깐만요. 진도 나가라고요? 스킨십요?"

"네..."

"재영 씨. 저 진짜 진도 느린 여자예요. B도 그걸 너무 잘 알고요. 분명히 B가..."

"일부러 그랬다고요? 수민 씨. 제가 지금 이 상황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분명히 수민 씨는 저를 밀어냈고 B 씨는 저를 받아줬어요. 지금 이러시는 거 과거의 수민 씨에 대한 좋은 기억마저 지우시는 거예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수민의 가슴 속이 쿵쾅거렸다.

그의 다음 말을 듣기 전에 그녀는 재빨리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의 말이 맞다.

뭐라 변명할 수도 없다.

수민은 자기 자신의 못난 마음그에 관한 모든 걸 털어버리고 당당히 결혼식에 참석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결혼식에는 T가 어떤 남자와 팔짱을 끼고 왔다. 그 남자는 양재영과 친한 듯 보였다.

그리고 T가 B의 부케를 받았다.

그녀의 소원대로 괜찮은 남자를 소개 받았고 곧 결혼하려나 보다.


우습게도 수민은 양재영과 사귀는 두 달 동안 그의 주변인들에게 양재영 소개팅녀로 알려져 그의 인맥으론 아무도 소개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아, 양재영과 만났던 그분.


이 상황이 다들 아무렇지도 않다고 한다.

오히려 수민을 제외하곤 모두들 행복해 보인다.


어디부터가 잘못된 것일까?

수민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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