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그랬어. 스물아홉, 서른, 서른 하나... 생각보다 별거 없어. 똑같아. 미리 겁먹을 거 없단 말이야. 너는 매일 열심히 살잖아. 그렇게 살면 돼."
수민과 친한 언니의 조언이었다.
삼십 대 초반까지는 그 조언이 어느 정도 먹혔다. 하지만 서른네 살이 되자 수민은 불안해졌다. 남자 친구도 결혼도 아이도... 무언가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것 같았다. 딱히 독신주의자도 아니었다. 길을 지나가면서 보이는 젊은 부부와 아이를 보면 부럽기까지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카페에 도착했다.
약속시간이 아직 이십 분이나 남았다. 카운터에 이름을 대니 아직 예약한 분이 안 오셨다며 구석 창가의 푹신한 소파가 있는 편한 자리로 안내해주었다. 수민에게는 이번 달에만 벌써 세 번째 소개팅이다. 서른셋까지 지켜보던 엄마가 올봄에 손을 잡아끌고 결혼정보회사를 데리고 가서 일명 엄카로 결재했던 것이다. 그것도 가장 비싼 상품으로... 수민은 이런 인위적인 만남이 너무나 싫었지만 한쪽 구석으로는 혹시나 하는 기대도 있었던 것이다.
수민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카페 문을 힐끗 보았다. 들어오는 남자마다 혹시? 하며 기대도 했다가 실망도 했다. 그렇게 세 명쯤 보내고 나서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왔다.
"이수민 씨 맞으시죠?"
"네에."
"안녕하세요? 양재영입니다."
수민은 실망감을 감추려고 애써 침착했다. 키는 자신과 비슷했고 얼굴은 추성훈과 슈렉을 반쯤 섞어 놓은 듯했다. 피부는 많이 타서 마치 체육인을 연상시켰다. 거기에 슬림핏의 남방을 입은 듯한데 옷이 끼어 보였다. 게다가 나이는 수민이보다 다섯 살 연상이었다. 그러니 서른아홉. 사실 수민은 자신이 남자의 외모를 따지지 않는다고 자신했다. 그래서 이렇게 남자의 외모를 스캔하는 자신을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가 차올랐다. 수민은 평소 사람을 만나면 외모에 가려지지 않은 진짜 그 사람을 알기를 원했는데 소개팅을 하다 보면 첫자리에서 자기도 모르게 외모를 수치화하고 있는 것이었다.
"... 그래서 제가 그 친구한테 그랬죠..."
"아, 네..."
양재영이라는 저 남자는 자기 말만 하는구나.
그러다
"저는 라면 같은 건 안 먹습니다. 집에 과자도 사다 두지 않아요. 몸에 안 좋으니까요."
"어떻게 라면을 안 드시나요? 그 맛있는 걸. 건강을 많이 생각하시나 봐요."
수민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결정사의 실장에게 양재영 씨가 회계사에 집안도 잘 산다는 말을 건너 들은 수민의 엄마가 이번 소개팅은 무조건 성사시키라는 엄명(엄마의 명령)을 내렸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도 반전은 없었다.
도. 대. 체. 결혼할 남자는 어떻게 만나는 걸까?
수민은 궁금했다.
하지만 자주 만나는 대학동창 친구들에게도 물을 수가 없었다.
현재 그들은 전부 싱글.
"수민아, 이번엔 어땠어?"
"기집애... 회계사라매~ "
"대박"
"야, 무조건 잘해봐야지~ 그래야 우리한테 뭐라도 엮어줄 거 아냐~"
두 친구 B와 T가 돌아가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때 수민에게 문자가 왔다.
양재영 씨... 역시 양반이 아니었던가.
"누구야?"
"그때 소개팅남."
"헉, 뭐야~ 만나는 거야? 오~"
"그냥 문자만 몇 번..."
"뭐야? 톡은 안 해?"
"부담스럽잖아. 문자가 좋다고 했어."
"기집애... 야. 그럴꺼면 나 줘."
B는 이런 말을 거침없이 한다.
"어머, 얘는 사람갖다 별소리를... 수민아, 너 그래도 문자 하는 거 보면 싫어하는 건 아니잖아. 잘되면 나도 좀 소개팅해주라. 그분 직장동료도 있을 거 아냐."
T는 이럴 때 기회주의자 같다.
"혹시 나중에 잘되면 얘기 꺼내볼게."
"야! 언제 사귀려구~ 그럼 자연스럽게 한번 데리고 나와봐."
"그래. 우리가 함 봐줄게."
이 친구들에게는 세상일이 참 쉽다.
수민은 한숨을 낮게 쉬었다.
수민은 성벽이 아주 높은 성에 살았다. 누가 가둔 것도 아닌데 날 때부터 그랬다. 어릴 때도 매사에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다. 덕분에 흉터 하나 없지만. 도전을 좋아하지 않았고 결정을 하려면 시간이 걸렸다. 그것은 연애에서도 그랬다. 깨끗한 피부와 청초한 외모로 남학생들에게 은근히 인기가 있었지만 잘 모르는 어떤 남자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쪽지를 받으면 다 버렸고 문자가 오면 모두 스팸 처리하였다.
그런 수민이가 단 한번 사귄 남자가 있었다. 대학교 3학년 때 교양수업에서 우연히 만난 세 살 많은 복학생이었다. 수민이 스스로 외모를 따지지 않는다고 했지만 키도 훤칠하고 성격도 좋았다. 우연히 같은 조가 되어 함께 대화를 나누고 프로젝트를 하다 보니 마음의 문이 저절로 열렸고 결국 만난 지 1년 만에 사귀게 되었다. 수민의 친구 B와 T는 그렇게 1년 만에 친구의 남자 친구를 보게 되었다. 수민은 사실 그 H오빠와 마음속으로 결혼까지 생각했었다. 그런데 만난 지 2년 만에 남자 친구가 이별을 통보했고 수민은 너무 충격을 받아 제대로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사랑을 했던 수민은 오로라 공주가 되어 가시덩굴이 겹겹이 쌓인 성 꼭대기에 잠이 들었다. 지금까지도.
양재영.
라면을 싫어하고 몸에 안 좋은 건 안 먹는다는...
분명 그날 수민이 마음속에 반전은 없었다.
이미 그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릿속에 거절 멘트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정말 좋은 분이시지만 저와는 인연이 아닌가 봐요. 좋은 분 만나세요. 이 정도면 괜찮겠지?'
그런데.
그의 애프터 신청은 없었다.
이럴 수가.
수민의 기분은 이건 정말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 나쁨이었다
왜. 왜지?
그날 뭔가 실수를 했었나?
수민은 소개팅 후 며칠 째 그날의 대화를 곱씹으며 양재영을 생각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