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하는 것은 어렵다. 특히나 소시오패스가 아니라면.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애정을 얻고 싶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머리는 아니어도 마음은 그렇다. 무언가 부탁을 받았을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나에게 도움도 안 되고 하기 싫은 일이라면 거절과 수락에 기로에 서서 고민하게 된다.
마음에 걸리는 무언가가 있는데 오케이를 한 뒤에 어떤 일을 해주거나 누군가와 시간을 보낸다면 그 미래의 나를 과거의 나의 결정을 후회하게 된다. '재미도 없고 발전적이지도 않은 이 일을 내가 왜 하고 있는 거지?'라는 현타가 오면서 시간과 에너지 낭비를 하는 자신을 처절하게 느끼게 된다. 그 현타를 제대로 느낄수록 좋은 이유는 그래야 추후에 비슷한 실수를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예외는 있다. 내가 그 사람이 마음에 들고 좋은 경우에는 머리로는 납득이 안되더라도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마음으로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 그냥 호감인 사람, 상황이 어려워서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라면 재미나 발전의 문제는 중요치 않다.
일을 할 때도 거절을 해야 하는 순간들이 온다. 나의 전문성과 관련 없는 일을 누군가 부탁하거나, 같은 이유로 누군가에게 부탁한 일을 나보고 하라는 식일 때. 일단 기분이 나쁘다. 불쾌하다. 나의 전문성을 몰라주는 것 같아 짜증이 난다. '이걸 나보고 하라고? 내가 여기서 무슨 일 하는지 몰라? 내가 그 단순한 일을 하려고 이제까지 열심히 일해온 줄 알아? 내 프로젝트에 당신이 뭘 기여했다고 이런 부탁을 해?' 이런 생각이 내 마음속에 몸속에 가득 자리 잡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어떻게 답을 할까. 거절할 것은 결정했는데 너무 공격적이지 않게 또 그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사실을 어떻게 이야기할까. 이런 상황에서 그 사람을 너무 부끄럽게 또는 화나게 만드는 것은 피해야 한다.
일단 나는 거창하고 과장되고 에두르는 표현이 싫다. 어쩔 때는 그게 나를 너무 답답하게 만들어서 싫다. 너무 비효율적이고 결국 착한 척 전문적인 척을 하기 위해서 그러고 있는 모습. '음.. 근데 안타깝게도 나는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또 왜 그 말을 그렇게 장황하게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아 지루하네요.'라는 마음으로 듣거나 읽는다 그 요청을. 떳떳한 사람은 장황하지 않다. 장황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내가 이게 필요해해 줄 수 있어? 이거면 충분하다.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해줄 수 있어? 이렇게 되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줘." 이런 식의 요청이 온다.
나는 "아니. 이렇기 때문에 나에게 그게 필요 없어, 그리고 그런 예외 규정을 정해 놓지도 않았기 때문에 너만을 위해서 그렇게 해줄 수는 없어."라고 말했다.
처음 쓴 이메일은 좀 더 강했다. "공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해줄 수 없어"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건 그 사람이 불공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대놓고 언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다. 부디 스스로 깨닫길... 이런 경우에는 한두 번 정도 내가 쓴 이메일을 더 읽으면서 좀 더 부드럽게 다듬어야 한다. 감정적일 때는 이메일을 보내지 않는다. 내가 잘못한 게 없어도 의사소통 방식 때문에 나에게 피해가 올 수 있기 때문이고, 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확률이 낮다. 아마도 나에 대해 방어적이고 감정적인 상태로 나를 그저 원망할 것 이기 때문에. 본인의 잘못에 대한 생각하지 못한 채로.
거절을 글로 쓰기, 이메일 보내기 버튼을 누르기, 보낸 뒤에 일정시간 나에게 붙어있는 화, 불안, 두려움의 감정 느끼기의 일련의 과정은 힘들다. 그 이메일을 보내자마자 바로 다른 업무에 집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내 업무를 방해한 그 요청 자체에 다시 화가 나기도 한다. 결국 집중할 수 없어서 업무를 내려놓고 그 불편한 감정들을 온전히 느껴본다. 어느 정도 혹은 완전히 그 감정이 내 몸에서 날아갈 때까지.
하지만 나는 안다. 거절하지 못하고 "당연하지. 그렇게 해줄게"라고 내 생각과 감정을 위장하고 말하는 것 그 자체에서 발생하는 찝찝함과 내가 아닌 게 되어버리는 그 거짓의 느낌. 약속을 하고 그 일이 발생하는 순간까지 느끼는 불안과 후회. 그리고 그 일을 이행하는 그 순간들에 내가 마주할 엄청난 후회. 이것을 피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거절해야만 한다. 실제로 내가 그 일을 강제로 하게 되더라도 최소한 내 생각을 표현을 한다면 엄청난 후회대신 짜증과 불만의 감정 정도로 타협할 수 있게 된다.
거절하는 것도 스킬이고 하다 보면 조금씩 능숙해진다. 물론 내 커리어 전문성이 같이 늘어야 더 빨리 는다. 나의 기여도와 전문성에서 자생하는 자신감은 내가 미움 당할 용기를 만들어주고 "아니오. 아닌데요."라고 말할 수 있는 심장을 만들어 준다. 나의 실력과 기여도에 자신감이 없을 때는 거절을 할 수 있는 케이스가 적어지고, 대부분의 요청을 수락해야만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이래서 직장에서 권한 관련 불만이 생길 때 내 실력을 더 키워야지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최근 넷플릭스에 취직한 친구가 회사가 일하기 좋다고 했는데 지금 너무 부럽다. 몇 달 전에도 부러웠는데 오늘 특히 부럽다. 열심히 일하고 윤리적이고 멋진 사람들에 둘러싸여 일해보고 싶다. 내가 부족하더라고 그들의 수준에 맞춰야만 하는 그 분위기 느껴보고 싶다 부디.
우리는 예스우먼, 예스맨이 아니다, 아니여야 한다. 아니기로 결심한 순간 아닐 수 있다. 타당한 근거와 간결한 핵심 내용으로 수락은 흔쾌히 거절은 산뜻하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