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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책 읽기에서 독서 모임으로.

챕터 : 나의 첫 사이드 프로젝트

by 재민

새해 ‘광양 아파트 현상’ 이후 이미 진행 중이었던 다른 아파트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건축 인허가 중 사업계획승인 단계에 있던 이 프로젝트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3팀으로 옮겨오면서 이 프로젝트에 의도치 않게 참여하게 됐는데 사실 내가 원하던 조합의 멤버가 아니었다. 새로운 팀에서는 같은 3팀 차장님과 같이 해보고 싶다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왔는데 현실에서 내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1팀 차장님이 PM을 맡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일과 시간에는 같이 프로젝트 하는 사람들과 대화도 하지 않을 정도로 성향이 맞지 않았다. 나는 처음 해보는 사업계획승인이다 보니 여러 가지 질문이 생겨났는데 차장님도 3팀 대리님도 아무도 제대로 질문에 답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을 뒤져도 보고 ‘국가법령정보센터’ 홈페이지를 뒤져보면서 스스로 답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1팀 차장님은 질문을 하는 내가 이상해 보였나 보다. 나는 단지 왜 이렇게 도면을 그리는지 이해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분명 작년 2팀에 있을 때보다 좋지 않은 회사생활이었다.

그러나 점심시간 책 읽기는 계속해서 이어갔다. 여러 말을 들었으나 계속해서 팀 점심을 하지 않았다. 혼자 투썸에서 샐러드를 먹을 때 가끔 샐러드를 먹고 싶은 회사 사람 한 두어 명이 와서 간만 보고 가곤 했다. 그러던 와중 2팀에서 친하게 지내던 용 대리님이 자신도 점심시간에 샐러드를 먹으며 작업을 하고 싶다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용 대리님은 이전에 소개했던 것과 같이 사진 인스타그램을 하고 계셨다. 사이드 프로젝트라고 하기엔 꽤 전문적이었다. 카메라 본체와 렌즈에 투자도 하고 주말마다 출사도 나가곤 했다. 평일에는 글과 함께 인스타그램 계정에 포스팅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팔로워도 꽤 있었고 몇몇 작가들과 교류도 한다고 했다. 사진 외에도 지인에게 의뢰를 받아 그림을 그려 선물하기도 했다.


용 대리님이 그때 왜 나와 함께 점심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아직까지 모른다. 분명 나처럼 팀 점심이 싫어서가 아니라 점심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싶어서일 것이라고 믿고있다. 점심시간에 용 대리님은 아이패드와 애플 펜슬이 있어서 장비를 활용한 작업을 했다. 아이패드에서 사진을 보정하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용 대리님이 합류하고 나서는 나도 길 건너 투썸에 같이 가는 사람이 생겼다. 우리 둘은 점심시간이 되면 같이 샐러드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면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듯 각자 일에 몰입했다. 몰입하면 서로 말도 걸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몇십 분을 집중하다 12시 55분이 되면 책과 아이패드를 덮고 투썸을 나와 회사 쪽으로 길을 건넜다. 항상 돌아가면서 했던 이야기는 점심시간이 끝나 정말 아쉽다는 이야기와 그래도 짧은 시간 얼마나 좋았는지였다.


나중에야 ‘독서 모임’이라는 이름이 생겼지만, 이 모임은 독서만 하는 곳이 아니다. 모두가 책을 읽고 싶어 하지 않으니 말이다. 누구는 그림을 그리고 싶고, 누구는 글을 쓰고 싶고, 강의를 듣거나 사진을 보정하고 싶어 했다. 그냥 점심시간에 자기 할 일을 하는 조금 특이하고 특별한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왠지 모르게 ‘독서 모임’이라는 이름이 주는 생산적인 느낌 때문에 그렇게 불렀나 보다. 물론 나는 독서 모임에서 유일하게 책을 읽었다. 그러다 가끔은 회사 이야기를 나누거나 미래에 대한 각자의 꿈, 혹은 현재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것들을 나누곤 했다. 비록 나는 대학교 때 동아리를 해 본 적은 없지만 마치 내 상상 속 동아리 모습이었다. 중요한 건 여기서는 누구나 솔직하고 가끔은 냉철하게 서로를 대하지만 그래도 서로를 진심으로 응원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잘되는 상상에 더 뿌듯한 모임이었다.


그렇게 내가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응원하듯 다른 사람이 나를 응원해 줄 때 무척이나 많은 힘과 용기가 되어 준다는 것. 그게 바로 커뮤니티의 힘이지 않을까? 회사에서 겉으로는 문제없어 보이지만 서로를 이용하거나 전략적 호의와 미소를 보이는 경우들이 있었다. 회사마다 분위기도 다르고 정치하는 법도 다르겠지만 꼰꼰 건축 글로벌 본부의 모습은 내가 바라던 이상향의 조직은 아니었다.


이런 조직 속에서 독서 모임은 서로를 순수하게 응원해주는 모임이었다. 퇴사 고민으로 흔들리는 시간 중에 나에게 힘이 되어 주는 모임이 생겼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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