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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 Apr 24. 2023

요즘 뭐하고 지내세요, 에 대답하기

이사를 오고 따로 커튼을 안 달아두었더니 아침 7시면 햇살을 받아 잠이 깬다. 바이오 리듬의 중요성을 몸소 체험하며, 확실히 허겁지겁 알람에 일어날 때보다 맑고 화사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함을 느낀다. 그래봐야 누에처럼 뭉그적거리다 8시에 일어나는 건 똑같지만.


잠도 일찍 깨니 9시 출근 전에 헬스장을 가는 것을 루틴으로 만드려고 노력 중이다. 작심을 하면 이틀쯤 갔다가, 엎어졌다 다시 일어나서 또 하루이틀쯤 하고, 나름 퐁당퐁당한 미라클모닝이 순항 중이다.


일찍 깨는 것을 차치하고서 굳이 아침에 헬스장을 먼저 들리는 이유는 따로 있다. 퇴근 후에 웨이트를 하는 행위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고되다는 것. 현재 나의 평일 출근은 오전 9시 출근, 7시(다행히 오후) 퇴근이다. 그러고 집에 도착해 저녁을 먹고 집정리를 하고 헬스장으로 다시 나오면, 뭐랄까, 다리힘이 쭉 빠진다거나 바벨을 못 들어올리겠단 느낌까진 아닌데, 말 그대로 정-말 고되다.


(유년 시절, 아버지도 그렇고 주변 어른들은 일을 하시며 ‘아이고 대다, 대’ 하시며 부산함과 노곤함을 표하셨는데, 글을 적다 보니 ‘고되다’의 줄임말인가 싶다.)


나는 '대다, 대' 전조 증상을 눈에 차오른 뻐근함에서 느낀다. 눈을 힘차게 꾸욱 감아 눈꺼풀이 샘을 지레 눌러 윤활액이 분비되어야만 시야가 트일 것만 같은 기분. 벤치 프레스를 하는 와중에도 눈이 뻑 감기고, 가끔은 하품도 난다. 누가 보면 나를 ‘이 정도는 눈 감고도 드는’ 웨이트 도사로 착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헬스장의 박지성이라 불릴 지도...


그래서 가끔은 아침에, 가끔은 저녁에 운동을 하고, 그것 외에는 일 말고 하는 것이 없다. 책도 잘 안 읽혀서 일을 시작한 열흘 동안 한 권 남짓 읽고 말았다. 이삿짐도 완전히 다 풀지 못한 집 꼬락서니를 보며 어떤 가구를 살지, 어떻게 배치를 할지 고민하는 것만이 요즘의 주된 관심사다. 직장에서도 틈만 나면 온라인 편집숍을 뒤적거리며 소파, 조명, 식탁, 의자 구경 삼매경이다. 함께 일하게 된 다른 선생님은 두 달 뒤에 결혼하실 예비 새댁이신데, 앉아서 검색하는 것만 보면 혼수는 내가 챙기고 있는 것 같다.





개인의 기준을 세우고 취향을 만드는 과정은 여전히 어렵고 멋진 도야인데, 무엇이 잘 나가고-귀하고-감각 있어 보일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은 이제 세상에 차고 넘친다. 침대에 누워 SNS로 게시글과 영상을 구경하고 있자니 식별력 부족한 눈에 자꾸 고운 것만 밟힌다.  


선이 얇은 책장을 하나 들이고 싶었는데 가격이 몇백을 호가하는 걸 보고 백스페이스를 지그시 눌렀다. 자취남의 월세방에 들이기엔 과히 거한 것 같아 이삼십쯤 하는 가구를 보고 있자니 시트지로 무늬를 낸 티가 나 모양새가 빠지는 게 거슬린다. 카레클린트에서 우아하면서 남성미 넘치는 테이블을 발견했더니 무옵션 가격이 300. ’ 미얀마 티크‘ 목재로 제작하면 400이 ‘추가’된다고 한다 - 배보다 배꼽이 더 클 때도 ‘추가’라는 단어를 쓰나요? 이래저래 이건 눈이 높아진 게 아니라, 눈을 버린 거란 생각도 든다. 솔잎을 못 먹게 된 송충이의 심정이다.




엊그제 출근 전에 지인으로부터 '고도원의 아침 편지'같은 멘트를 담은 카톡이 왔다.


<욕망하면 행복이 줄어든다, 그러나 욕망하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다>
요새 나의 중용 포인트일세.


그의 아포리즘을 읽고 떠오른 나의 답변은 아래와 같았다,


“욕망은 그렇다면 어디서 왔는가, 내 안에서 왔는가, 타인이 하는 말에서 왔는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닌 타인(사회)이 욕망하라고 등 떠밀어지는 것은 또 어떠한가.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땀을 내는 삶, 그것도 ‘나를 위한’ 발전인가.”  


더불어 거의 모든 1차원적 욕망이 자본으로 해결 가능한 현대에, 남에 의해 만들어진 갈망일 가능성이 높은 소유욕을 채우기 위한 땀방울이라면. '내가' 원하는 것인지도 모를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무작정 돈을 쌓으려 달려드는 것이라면.

 



나도 이제 저 가구가 정말 멋져서 멋져 보이는 것인지, 멋져 보인다는 정보들이 내 뇌를 자꾸 타격하니 그렇다고 믿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인테리어란 본질적으론 '아무려면 어떠하리'의 영역이어야 하지 않나. 책장을 시트지로 만들건 말건, 오 년 십 년 갈 원목으로 짜 맞춰 오일을 바르며 관리하건 말건 - 수납되고 또 꺼내어 읽을 책은 변함없을 터인데. 그러나 이런 쓸모없는 욕망이 나를 공간을 가꾸고 아름답게 비춰 보이도록 만들게 하는 동인인 것도 사실이다.


오늘의 집, 아파트멘터리, 보블릭, 스톨리.... 온갖 온라인 편집숍들 - 결국 모아 모아 네이버 쇼핑 장바구니로, 당근마켓과 번개장터를 뒤적거리리다 끝내 결제 버튼은 못 누른 채 퇴근을 하고 잠에 든다. 감각을 실행에 옮기는 것도 결국 돈의 문제구나 - 싶은 구조적인 불만을 작게 토로하며, 아무런 변화도 만들지 못한 채, 여느 사람들처럼 스마트폰을 손에 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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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누가 요즘 뭐 하고 지내냐고 물으면, 별달리 꾸며낼 서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일 끝나면 운동하기 힘들다는 말도, 이불에 들어가 그냥 누워만 있고 싶다는 말도, 본격적인 직장인이 되고서야 좀 공감하는 척할 수 있게 됐다. 지금의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뭐라 할 대답이 없어 그냥 누워서 유튜브나 보고 있지요- 하고 말 테다.


그 ’ 누워서 유튜브나 보고 있지’라는 말은 일종의 증상이며, 호소이고, 현대 사회가 도래하며 무기력증

환자들에게 생긴 행동 양식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예, 요즘 전 무기력합니다. 적응과 정리라는 핑계로 시간을 마음껏 흘려보내도 상관없단 듯 무기력을 달고 사는 요즘, 아무래도 내겐 얼음을 깨부술 도끼 같은 치료가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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