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로서의 삶에 대해 다시 고민하기, 나는 마음을 내어주고 있는가
이건 우리 반 아이들에게 쓰는 편지입니다. 그리고 교사로서 나는 부족한 점이 없었는지에 대한 반성문이기도 합니다. 사춘기 시기 친구들 사이 미묘한 서운함들이 쌓이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따돌리거나 공격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용기내어 친구에게 손 내밀어주지는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누군가는 소외감을 느끼고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건 모두가 함께 해야 하는 고민이고 또 반성입니다. 생각이 잘 정리가 안돼 잠이 안오는 터라 새벽까지 글로 생각을 정리해봅니다.
친구 관계와 하늘마을 공동체를 돌아보며
머리가 복잡하다. 글로 정리하지 않으면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 것 같아서, 힘들지만 글로 써본다.
이건 교사로서의 고민들이다.
졸업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이 이야기를 굳이 학급 전체 이야기로 수면 위에 올려서 다같이 많은 힘을 들여 이야기를 주고 받아야 하는 이유가 뭘까? 나는 우리의 하늘마을 공동체가 졸업한다고 해서 끝이 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간적으로 우리 학교에서의 시간이 끝이 날 뿐 이 공동체는 길게 이어질 것이다. 당장 같은 중학교를 가는 친구들도 적지 않고, 이 곳을 떠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때에 따라 자주 만나게 될 것이며, 유년기를 함께 했던 든든한 친구들로서 서로에 마음에 남아 끊어지지 않고 끈끈하게 이어지게 될 관계들이다. 졸업한지 20년이 되어도 자주 만나 친한 친구로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영혼의 동반자로 관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졸업생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특이한 일도 아니라 대부분의 우리 학교 졸업생들은 어딘가에 흩어져 있다 하더라도 늘 이어져서 여전히 지낸다는 것이 우리 학교에서의 삶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것 같다. 그러니까 졸업이란건 2024년의 끝을 의미할 뿐 2025년이 된다고 하더라도 이 공동체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마을은 언제나 모두에게 특별한 의미로 남는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마지막 일 년에 많은 것들을 함께 하고 학교를 떠나기 전 마지막을 함께 보냈다는 의미에서 다른 학년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는다. 사실 나만 하더라도 6학년 때의 기억은 비교적 선명한데 비해 5학년~1학년 때의 일이나 친구들은 거의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그 기억의 오래감은 중3때도 마찬가지고 고3때도 마찬가지다. 고등학생때 친구들이라 하면 사실 거의 고3때 친구들로 기억된다. 졸업학년에서의 유대감이라는 것은 다른 것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특별한 것이다. 너희에게도 하늘마을은 그런 의미로 오래도록 이어지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중요한 건 이 곳을 떠나는 시점에 잘 헤어져야 한다. 잘 떠나야 한다. 그것이 졸업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졸업은 하늘마을로서의 공부가 마무리 되었다는 의미일 뿐이고, 우리의 공동체는 영원히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번에 몇 몇 친구들이 서로 무리를 짓고 어울리며 의도치 않게 다른 친구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또 한 번 이야기에 오르게 됐다. 무리를 짓는다는 말은 어감 자체가 좋지를 않다. 왜냐하면 그 말 속에 이미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거나 차별하거나 구부짓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들릴 것이다. 어제는 각자가 자신의 경험이나 감정을 이야기하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는데 나는 그 자체로 의미가 큰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야기를 꺼내놓지 않으면 다른 친구의 생각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의 이유는 소통의 부족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는 없다. 우리는 늘 이야기를 많이 나누며 살아왔다. 그런데도 소통이 부족했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거나 아쉬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부족했다는 것 같다. 정작 이 이야기가 중요한데 불구하고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의 이유는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쟤는 저럴 것이다 라는 선입견이나 편견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됐든 중요한 순간 순간에는 분명하게 자신의 생각이나 이야기를 꺼내 놓아야 한다. 그래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대부분의 갈등이나 서운함은 다른 친구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온다. 상대방의 생각이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면 오해나 갈등도 줄어든다. 그런데 이해를 하기 위해서도 필요한건 결국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다른 친구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두 번째고 결국 다른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리 지어 노는 것이 다른 친구들에게 위화감이나 소외감을 주고 때론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하지 않았던걸까? 그런 대화를 끌어내지 못했다면 그건 교사로서의 나의 부족함이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부족했던걸까? 반성하며 일년을 돌아보니 꽤 여러 순간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여러 번 나누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잘 헤어지기 위해 졸업을 3주 남은 이 시점에도 우리는 각자가 처절하게 반성해야 한다. 충분히 각자가 노력을 했는가에 대해서 반성해야 한다. 학교에서는 우리는 좌충우돌하며 공동체로서 뿐만 아니라 친구 관계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하고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며 잘 성장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방과후의 삶은 어떠했는가? 주말의 삶은 어떠했는가? 학교에서 공부시간이라는 시간에 묶여있는 그 시간 외에 내가 자유롭게 친구들과 생활을 맺을 수 있는 그 시간에 나는 다른 친구에게 얼마나 손 내밀어 주었는가에 대해 처절하게 반성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 몇 몇과 어울리며 웃고 떠들며 우정을 쌓고 행복해하고 있는 같은 시간에 그 자리에 초대받지 못한 친구는, 혼자 시간을 보내며 그 자리에 끼지 못한 것이 서운해하고 슬퍼하지 않았을지. 가끔 어떤 친구가 ‘나도 같이 가고 싶었는데, 나도 같이 놀고 싶었는데’ 하는 투정을 단순히 불편한 이야기로 취급하며 무시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 다시 한 번 우리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만 즐거우면, 나와 가까운 몇 몇 친구들끼리만 즐겁고 행복하면 되는건가? 같은 반 친구는 집에 혼자 남아 울고 있는 와중에 나는 웃고 떠들고 행복한 것이 그게 우리가 배워온 정신이며 우리가 세워온 공동체성인가?
몇 몇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노는 것, 어딘가에 자기들끼리만 함께 놀러가는 것, 초대한 몇몇 친구들끼리만 집에서 함께 어울리는 것, 자기들끼리만 아는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 자기들끼리만 비밀을 만들고, 자기들끼리의 관계만 특별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
그것은 자기들끼리는 즐겁고 행복할지 몰라도 하늘마을 공동체 전체를 보자면 분명히 상처를 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우리는 꽤 여러 번 주고 받았고 같이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그때 반성을 했던 기억도 있다.
이번에도 묻고 싶다. 나는 그런 행동에 대해 충분히 반성을 했는지. 그렇다면 내 행동이 달라졌는지. 내가 먼저 친구에게 손 내밀어 주었는지.
다른 친구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때론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용기가 줄어들면 공동체는 작은 무리로 차츰 나뉘어지고 구분지어진다.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공동체로서의 행복이었던가?
무턱대고 우리는 잘못만 했노라고 다른 친구들에게 상처만 주며 살아왔노라고 반성만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친하지 않은 친구와도 잘 지내려고 노력했던 기억들이 있고 다른 친구를 밀어낸다거나 따돌린다거나 배척한다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하늘마을 공동체로서 하나가 되어 살아온 기억도 많다.
그런데도 나를 포함해 우리가 모두 이 반성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더 잘 살기 위함이다. 더 잘 자라기 위함이다. 개인으로서 뿐 아니라 공동체로서도 잘 자라기 위함이다. 우리가 얼마나 충분한 노력을 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만하면 노력했지. 충분히 잘 살았지 하고 만족할 것이 아니라, 더 잘 살기 위해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 그런 일들이 생기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면 좋겠다. 사실 우리의 관계라는 것은 너무나 복잡 미묘하다. 때로는 몇 몇 친구들과 가까웠으나 이제는 전보다 멀어지기도 했고 나이가 들며 친구에게 전보다 의존한다거나 매달리는 일도 생기게 됐다. 관계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친구를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때론 관계에 대한 욕심을 부리기도 했다. 때로 이 관계는 나만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내 친구’가 다른 친구와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 은근히 질투가 나기도 한다. 서운하기도 한다. 나랑만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는, 나랑만 놀았으면 좋겠는 내 친구가 다른 친구와 친하게 지내면 어쩐지 서운하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관계를 점점 넓혀나가는 것이 아니라 축소해 나간다. 나만 그 친구를 갖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이런 마음도 있다. 내가 다른 친구에게 받은 상처를 감추거나 보호하기 위해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를 더 강하게 맺는 마음도 있다. 그래야만 내가 보호받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전체로서 함께 서는 것은 어렵지만 친구 서너명과의 무리를 세워 그 관계에 특별함을 부여하고 그 관계에 의지하고 그 관계만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모두의 마음이라는 건 약하고 여리다. 내가 선생님으로서 보기에 관계 문제에 대해 나는 강인하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은 적어도 우리 마을에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 서로를 보듬어 주어야 한다. 서로의 마음에 공감해주고 손 내밀어 주어야 한다.
우리는 반이 바뀌지 않고 긴 시간을 함께 살아왔다. 그래서 서로에 대해 서운한 기억들이 적지가 않다. 반면에 좋았던 기억들도 역시 많다. 친구와 친했다가 멀어지거나 아니면 그 친구에 대해 선입견을 갖게 되는 일들도 많다. 그리고 좋은 모습을 보게 돼 친구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갖게 되는 일들도 많다. 그 모든 기억들이 우리의 일부고 자연스런 사랑의 일부다. 이건 사랑이라는 단어 외에 다른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사랑에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쌓인다. 사랑이 늘 즐겁고 좋기만 한 것이라면 가장 사랑해야 하는 존재인 가족끼리 싸우는 것, 서운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반이 바뀌지 않고 길게 유지된다는건 서로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게 해주고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배려하고 존중할 수 있게 해준다. 반면 오래도록 같이 지낸다는 건 나쁜 기억들도 많이 쌓이게 해준다. 어쩌면 서로에 대해 멀어지는 것, 손 내밀지 않게 했던 것들은 그런 일들로 인해 내 마음 속에 무언가 불편함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선입견이나 편견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 친구와 나는 잘 안맞아 라며 마음 속에 미리 선을 긋고 관계를 스스로 고정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어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도 책 좋아해’ ‘나도 음악 듣는거 좋아해’라는 몇 몇 친구의 혼잣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 말 뒤에는 아마 단순하게 자신을 제한지어 생각하지 말아달라는 의미가, 선입견을 갖지 말아달라는 의미가 들어있으리라 생각한다.
사람끼리 가까워지고 멀어짐은 온전히 마음의 문제라 강제할수도 없고, 억지로 무언가를 하게 하면 오히려 마음에 반대 심리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노력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것은 노력 ‘할 수 있다’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노력‘해야만 한다’는 의무의 영역이라 생각한다. 노력하지 않으면, 먼저 손 내밀지 않으면 세워지는 것은 없다. 친구들끼리의 사랑이나 우정에는 그것을 가꾸려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껏 우리가 충분히 노력했는지 묻고 싶다. 내가 받은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남에게 준 상처는 없는지에 대해 반성해봤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소외 받고 상처 받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닌지. 노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지.
공동체라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주면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게 된다. 그것들이 끊임없이 연결되어 끈끈하게 이어지는 것 그것이 공동체라는 것이다. 다만 내가 어느 누구에게도 노력하지 않는다면 다른 누군가도 나에게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공동체’라고 부를 수 없는 하나의 집단에 그치게 된다. 우리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올해를 어떻게 마무리 할 것인가? 그저 노력하지 않고 방관하며 나만 즐겁고 행복한 채 다른 친구의 슬픔이나 상처는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먼저 손 내밀고 다른 친구도 나에게 손 내밀어주는 경험을 함께 할 것인가?
유치원생이나 1학년들이 이 말이 가장 감동을 주는 말이라며, 나에게 큰 힘을 줬던 말이라며, 이 말을 들었을 때 가장 기쁘다며 꼽는 말이 있다. 별로 어려운 말도 아니고 용기를 내야 하는 말도 아니다. 딱 네글자. ‘같이 놀래?’ 그 말을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고 한다. 친구에게 손 내밀어주는 말, 그 말이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