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하늘을 나는 소녀
[연재소설] 벚꽃 맨션의 비밀
미지는 치요코 할머니를 만나고부터 수업이 일찍 끝나는 수요일마다 할머니 집을 찾았다. 그리고 16살이 되면서 그날은 목요일로 바뀌었다. 1년 좀 안되게 만난 할머니는 일본에서 온 것 같고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 듯했지만, 선뜻 개인사정을 물어보기가 어려웠다. 대신 할머니는 집을 방문할 때마다 오래된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주었다.
미지가 할머니 집에 가는 날만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도 그녀는 6교시가 끝나자마자 학교 밖으로 내달렸다. 숨이 차 오르는 지도 모르고 언덕배기 마을의 굽이진 골목을 재빠르게 올라갔다.
“띵-동”
교복을 입은 앳된 소녀가 벚꽃 맨션 201호에 도착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두 볼을 한 채 숨을 고르는 사이, 치요코 할머니가 현관문을 열어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보라색 라벤더 원피스에 맞춘 보라색 머리띠는 그녀가 얼마나 자유로운 사람인지를 나타내는 듯했다. 미지는 독특한 할머니의 취향이 참 좋았다. 할머니를 따라 집으로 들어서자 부드러운 오후의 햇살이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집은 오래된 맨션답게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엔틱 가구로 꾸며졌다. 고풍스러운 몰딩과 2층 높이의 기다란 거실 창이 엽서에서나 볼 법한 유럽의 어느 고성 같은 분위기도 자아냈다.
처음에 왔을 때는 눈이 휘둥그래졌지만, 이제는 그저 편안한 할머니 집일 뿐이었다. 미지는 평소처럼 성큼성큼 거실로 가 커다란 가죽 소파에 철퍼덕하고 앉았다.
치요코는 파리 출장에서 사 온 쿠키를 뚜껑을 열어 미지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미지는 쿠키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치요코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반짝이는 그녀의 눈빛은 무엇을 원하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오늘은 ‘아메 네코’에 대해서 이야기해 줄까? 고양이 좋아하니?”
“네!”
미지가 기다렸다는 듯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쿠키를 한 입 베어 물며 싱긋이 웃었다.
“어디 보자. 아메 네코 일본어로 비와 고양이가 합쳐진 말이야. 일본에는 비가 그치고 맑게 개인 저녁에 아메 네코가 나타나 사람을 돕는다는 전설이 있어. 아무나 다 도와주는 건 아니고.”
할머니가 예쁜 장미 모양의 찻잔에 담긴 홍차를 한 모금 홀짝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고난에 처했을 때 도와줬던 사람에게만 나타나 특별한 일을 경험하게 해 준단다.”
“특별한 일이요? 예를 들면 어떤 거요?”
미지는 길 고양이를 마주칠 때마다 먹을 것을 나눠 주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한 번도 실천해 본 적이 없음에 안타까웠다.
“예를 들면 고양이의 초능력으로 고양이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
“네?”
“도움을 받았던 아메 네코가 찾아오면 마치 높은 피아노 음이 들리는 듯하단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이 듣는 소리 라기보다는 초음파 같은 게 느껴져. 마음으로 고양이의 메시지를 전달받을 수 있도록 한다고 할까?”
미지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갸우뚱거렸다.
“아메 네코의 메시지는 뭔데요?”
“딱 두 마디.”
"고양이를 좋아하세요?
그렇다면 하늘을 날아 볼까요?"
“네?”
흥미롭다는 듯이 미지의 표정이 웃음으로 가득 찼다. 그녀의 귀여운 보조개가 더 깊게 패이는 순간이었다. 신난 표정을 읽은 치요코는 어서 말을 이었다.
“재미있지? ‘좋아.’라고 답하면 아메 네코가 하늘을 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해 준단다. 비가 개고 난 밤하늘을 날면 정말 아름답지.”
마치 할머니는 실제로 아메 네코를 만나 하늘을 날아본 것을 떠올리듯이 눈을 감았다.
“할머니의 유명한 작품도 하늘을 그린 게 많잖아요. 혹시 할머니도 아메 네코를 만나 하늘을 날아 보신 거 아니에요?”
미지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미지야, 말이 나와서 그런데 내 첫 작품을 보겠니?”
치요코는 미지의 질문에 대답을 피하며 우두둑거리는 무릎을 짚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우와! 정말이에요? 여기에 있어요?”
“모찌롱!(당연하지).”
치요코도 웃음이 났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첫 번째 작품을 사랑스러운 미지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둘은 거실을 벗어나 복도로 갔다. 복도 끝에 위치한 문을 열자 아주 긴 방이 나타났다. 기다란 양쪽 벽을 따라 그녀가 그려온 많은 작품과 캔버스가 세워져 있었다.
방문의 맞은편 끝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봄이 한창인 4월답게 창 밖으로 벚꽃 나무가 연신 흔들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방문을 열자 바람이 통했는지, 활짝 열린 창문으로 연 분홍빛 꽃 잎사귀가 눈꽃처럼 쏟아져 내리는 장관이 펼쳐졌다.
“이 방은 정말 예쁘네요. 포근한 햇살도 좋고 벚꽃 풍경도 정말 멋져요. 그런데 벚꽃이 이렇게 방에 들어와도 괜찮은 거예요? 치우기 힘드시지 않으세요?”
“바람만 들어오는 게 너무 아쉬워 가끔씩 이렇게 방충망까지 다 열어 둔 단다. 벚꽃, 나뭇잎, 벌레, 새, 그리고 고양이도 들어오지. 사실 그림을 위해서라면 이 방은 좋지 않아. 남향이라 햇빛이 하루종일 너무 잘 들거든.”
“그런데 왜 이방을 할머니의 보물 창고로 쓰시는 거예요?”
보물 창고란 말에 치요코의 주름진 입에서 웃음이 또다시 새어 나왔다. 한때의 그늘진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는 둥그스름한 얼굴을 한 인상 좋은 할머니가 되었다.
“그래, 보물 창고란 말 좋구나. 처음 이 집을 보러 왔을 때, 사실 이 방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계약을 한 거거든. 그때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내 작품도 이렇게 예쁜 벚꽃을 함께 봤으면 했지. 지금이 가장 예쁠 때야.”
“제가 봄에 온 건 참 행운이네요.”
해맑게 웃으며 미지가 말을 이었다.
“이곳은 제가 태어나 와 본 곳 중에 최고로 멋져요. 벚꽃 맨션도 멋진 곳이지만, 이 방은 그저 멋지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해요. 뭔가 신비한 힘이 느껴진다 고나 할까요.”
“신비한 힘?”
살짝은 독특한 미지와의 대화는 언제나 치요코를 즐겁게 했다.
“네, 웃지 마세요. 저는 어떤 느낌이 오는데 할머니는 안 그러세요?”
“그래. 나도 그런 느낌이 들어. 네 말대로 특히 이 방은 나의 비밀이 가득한 곳이란다.”
치요코는 창가 아래 오래된 선반 위에 세워진 작품 하나를 꺼냈다. 분홍색 같기도 하고 보라색 같기도 한 색이 붓의 질감을 잘 표현한 채 덧 발려 있다. 묘한 느낌이 드는 배경의 한가운데는 어떤 여자 아이가 잠옷을 입고 하늘을 나는 모습이 작게 그려져 있었다.
“이게 바로 내가 한참을 쉬다가 처음으로 그린 첫 번째 하늘 그림이란다.”
치요코는 하늘을 다양하게 해석하여 그린 그림으로 유명해졌다. 현대의 바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싶을 때면 치요코의 전시장을 찾곤 했다. 흐린 하늘, 맑은 하늘, 오묘한 색이 담긴 하늘 등 모두 다른 하늘이었다.
하늘을 그리는 치요코는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하늘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고. 바람도, 사랑도, 그리움도 모두 이 속에 담아 그리는 것이라고.
“할머니의 하늘 시리즈 그림의 원형이네요. 그런데 이 그림에는 하늘을 나는 소녀가 있어요.”
“그래. 알려진 것 중엔 유일하게 사람이 그려진 작품이지. 어때, 이런 하늘을 날아보고 싶지 않니?”
“할머니 하늘 그림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속을 직접 날아본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인간은 누구나 이렇게 하늘을 나는 상상을 하지. 미지도 그런 경험이 있을 텐데?”
“음…….”
미지는 생각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부끄러워 말하지 못했다. 그녀도 초등학생 때 한창 하늘을 나는 상상을 많이 했었다. 밤이면 하늘을 날아 좋아하는 남자아이의 집 창문 밖에서 그를 보고 싶다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미지가 답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치요코가 대신 답했다.
“난 엄마가 돌아가시고 하늘을 날고 싶었어. 하늘나라가 있다면 엄마를 만나지는 못해도 하늘로 올라가 보고 싶었지.”
그때 기적처럼 눈썹이 하얀 고양이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미지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한 채.
“이제 하늘을 나는 미련은 없어. 믿을지 모르겠지만 날아봤거든.”
“설마 아까 그 아메 네코?”
치요코는 대답 대신 눈가에 가득 주름이 지는 소리 없는 웃음으로 답했다.
....
중간고사가 있어 몇 주 후에 다시 벚꽃 맨션을 찾았을 땐, 흐드러지던 벚꽃은 다 떨어지고 초록 잎이 제법 많이 올라 와 있었다.
설렘을 안고 오랜만에 초인종을 눌렀지만, 할머니는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을 눌러도 인기척이 없었다.
다음번 방문했을 때는 현관문을 두드리기도 했고 정원으로 나와 할머니의 2층 테라스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며칠 동안 해가 져도 불이 켜지지 않는 집을 보고 미지는 깨달았다.
치요코 할머니가 사라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할머니 비서의 전화번호라도 알아 놓는 건데.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