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정은 자칭 ‘동네 탐험가’라 떠벌리고 다니는 오미지라는 몸집이 작은 여자 아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미지의 세계가 어딘가 존재할 것 만 같았다. 부모님이 이름을 미지라고 지은 것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미지는 시간만 나면 배낭 가방에 물 한 병과 크래커 한 봉지를 넣고, 유년기를 보냈던 <언덕배기 마을>로 동네 탐험을 떠났다. 부모님은 장사를 하느라 바빠서 그녀가 밖에서 무얼 하고 돌아다니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언덕배기 마을은 부산에서도 경사가 높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피난민들이 내려와 급히 짓다 다 보니 집과 집 사이가 바로 골목길이 되었다. 오래되고 허름한 집이 가득한 동네였지만 집 앞에 내놓은 파란 플라스틱 화분에 심긴 고추나무와 대파가 정겹게 반겨주는 곳이기도 했다.
햇볕이 따사롭던 어느 날이었다. 미지는 중간고사가 끝나서 시내에 만나자던 친구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여느 때처럼 언덕배기 마을로 갔다. 울퉁불퉁한 골목길이 슬리퍼 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제법 길처럼 쭉 뻗은 골목길도 있었지만, 그녀는 몇 번의 코너를 돌고 좁은 계단을 오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길로만 다니다 보면 사람들이 떠나버린 빈집 촌으로 가게 되었다. 미지는 녹슨 파란 대문 집 앞에 멈춰 섰다. 오늘따라 유달리 그 집의 벽이 기울어져 보였다. 그녀는 이러다 붙어 있는 옆의 집까지 도미노처럼 우수수 쓰러지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얼떨결에 집 옆의 아주 좁은 골목을 발견하였다.
사실 그곳은 골목 이라기보다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집과 경사 흙을 덮어 놓은 시멘트 벽 사이였다. 틈인지 길인지는 모르겠으나 15살 비쩍 마른 소녀가 들어가기에 충분해 보였다. 대각선으로 쭉 이어진 것이 왠지 새로운 곳으로 안내할 것만같았다. 어쩌면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미지의 세계로.
막상 틈으로 들어서니 미지의 어깨로 벽이 닿을 듯 좁았다. 앞을 보니 여러 집의 벽이 한 집처럼 붙어 쭉 이어졌는데 각 집의 형태에 따라 길이 좁아졌다가 넓어졌으므로 미지는 몸이 들어가는데 까지 가 보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엄청난 오르막이었다.
'여기가 길은 맞나? 마지막에 막힌 벽이 나오는 거 아냐?'
속으로 이렇게 생각은 해도 이 길은 막힌 벽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무언가 나타날 것 만 같은 좁은 틈새를 따라 계속 올라갔다. 눈으로 보기 전까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숨소리가 가빠진 미지는 결연한 표정으로 보폭을 늘렸다.
그녀의 예감대로 역시나 좁은 길의 끝은 벽이 아니었다. 특이하게도 마지막엔 시멘트로 대충 발라 놓은 듯한 높은 계단 3개가 있었다. 그리고 계단을 오르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자동차가 다니는 꽤나 널찍한 도로가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도로 너머로는 아름다운 산책로와 고급 빌라가 줄지어 있었다.
“우와……내가 부산에 살면서 이런 데는 처음 본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계속해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마치 외국에 온 것처럼 야자수 나무로 이어지는 산복도로를 따라 걷다가 한순간 눈이 더 크게 동그래졌다.
고급 주택 단지 중에서도 가장 웅장한 벽으로 둘러 쌓인 ‘벚꽃 맨션’ 앞에 서게 된 것이다.
미지는 언덕배기 마을을 찾을 때마다 매번 벚꽃 맨션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사실그곳이 동네 모험의 최종 목적지였다.몰래 들어가 보려고 했지만, 붉은 벽돌이 너무나도 높게 쌓아 올려져 도무지 들어갈 수가 없었다. 곳곳에 방범용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고, 만약 들어가야 한다면 정문을 통해 가는 수밖에 없었다.
벚꽃 맨션의 정문은 나지막한 계단을 몇 개 위로 붉은 벽돌 아치문이 두 개 있었다. 왼쪽의 작은 아치문은 항상 열려 있지만, 바로 옆에 경비실이 붙어 있어 들어가기 쉽지 않아 보였다. 오른쪽의아주 큰 아치 문은 항상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자동차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지하로 들어가는 구조였다.
그녀는 한동안 ‘진정한 탐험가라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정문을 통과해 벚꽃 맨션 안으로 꼭 들어가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 때문에 괴로웠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벚꽃 맨션에 몰래 들어가 보기로 결심한 날이 왔다. 막상 벚꽃 맨션 앞에서 들어가려고 마음을 먹으니 그녀의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어찌나 흥분됐던지 온몸의 혈관이 뛰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높은 벽을 따라 정문으로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전기가 흐르는 듯 온몸이 찌릿했다.
철옹성 같던 벚꽃 맨션은 평소처럼 신문을 읽는 데만 집중하던 경비원 덕분에 생각보다 수월하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낯선 외부인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이미 카메라가 다 설치되어 있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작고 야윈 데다 교복을 입고 있어 별로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였을까. 미지는 경비아저씨에 대해 잠깐 생각하다 정문을 통과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떨리던 마음은 이제 기쁨으로 바뀌었다. 드디어 새로운 곳을 탐험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큰 벚꽃 나무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제일 처음으로는 장미 광장을 마주하게 되었다. 흐드러지게 핀 색색들이 장미꽃이 유럽풍 분수대와 함께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장미 광장에서 이어지는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아치 화랑을 따라 걷다 보니 ‘가동’과 ‘나동’ 사이에 있는 야자나무가 심겨 제법 이국적인 야외 수영장에 도착하게됐다. 감탄을 금치 못할 광경이었다.
멍하니 서서 구경하던 그때, 수영장 너머 잔디밭에 누군가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미지는 들키면 안 되는 존재였지만 본능적으로 쓰러진 사람에게 황급히 달려갔다.
“괜찮으세요?”
가까이 다가서서 보니 60~70세 정도 되는 할머니였다. 주말 드라마에 나오는 부잣집 사모님 같은 풍성한 파마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살집 있는 체형에 도넛처럼 생긴 원형이 잔뜩 그려진 화려한 실크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풍겨져 나오는 아우라가 심상치 않은 것이 예술적인 일을 했거나 그런 감각이 뛰어난 사람 같았다.
“내가 쓰러진 줄 알았나 보구나. 걱정 말거라. 가끔 이렇게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것뿐이니까.”
그녀는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걱정되어 달려와준 귀여운 소녀에게 눈을 마주쳤다.
“못 보던 얼굴이구나. 여기에 놀러 왔니?”
작은 키에 푸근한 인상을 한 할머니는 손녀 뻘의 미지가 반가워 보였다. 살짝 어눌한 발음에는 일본어의 느낌이 묻어 있었다.
“네. 저는 동네 탐험가인데요, 아래 언덕배기 마을은 거의 다 둘러봤는데 여기는 못 봐서 참을 수가 있어야죠. 몰래 들어오긴 했어도 도둑은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집 안으로는 절대 안 들어갈 거예요. ”
미지의 말속에는 ‘맨션의 집안이 아주 궁금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 그럼 내가 이곳을 소개해 주는 게 어떨까?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참이었거든.”
그 속뜻을 잘 알아들은 눈치 빠른 할머니였다.
“네! 감사합니다.”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친구 할까? 난 치요코 야. 잘 부탁해.”
“전 노덕 중학교 2학년 오미지이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부산 사투리와 일본 어투는 교묘하게 잘 어우러졌다. 둘의 수줍은 인사를 시작으로 그들의 특별한 인연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