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몰랐다, 그것이 전조증상일 줄은
나는 파릇파릇한 20대 때부터 장염을 자주 앓았다.
자격증 공부를 한답시고 학교 앞에서 혼자 하숙집에서 생활을 하던 시절에 특히 그랬다. 20대 초반, 친자매 같은 대학 친구 2명과 함께 시작한 첫 독립이자 하숙 생활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 우리는 수시로 서로의 방문을 두드리며 만나 수다를 떨고, 꽤 자주 바로 앞 술집에 가서 밤늦도록 술을 마시곤 했다. 숙취가 심한 나는 술 마신 다음 날은 항상 골골댔다. 그렇게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 조금 과식을 했다 싶으면 여지없이 장염이 찾아왔다. 복통, 구토, 설사를 동반한 장염은 괴로웠지만 한나절 정도 앓고 약을 먹으면 금방 나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또 비슷한 시간에 맞은편 친구의 방문을 '똑똑'하고 두드렸다. 우스갯소리로 우리는 '똑똑'은 '뭐 해, 나가자!'라는 소리라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면 바로 겉옷을 챙기는 시늉을 하며 낄낄거렸다.
웬만큼 아픈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만큼 나는 무딘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지금 생각해도 지독하고 지독한 장염이었다 싶게 아픈 날이 있었다. 하숙집에서 혼자 인터넷 강의를 듣다가 갑자기 피자가 먹고 싶어서 혼자는 다 먹지 못할 양의 피자 한 판을 충동적으로 주문했다. 그리고 몇 조각 먹고 남은 피자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피자 박스 그대로 뜨끈하게 난방을 켜놓은 방바닥에 놓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늦잠을 자서 하숙집 아침 식사 시간을 한참 넘겨 일어나 버린 나는, 아점으로 전날 먹고 남은 피자를 해치우듯이 먹어 치웠다. 오후가 되자 배가 싸르르 아파오자, 대수롭지 않게 '또 내 친구 장염이 찾아왔군.'이라고 생각했다. 워낙 자주 앓던 탓에 주위 지인들은 내가 장염에 걸렸다고 하면, '또 왔구나 네 친구.'하고 놀려대곤 했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구토와 설사가 유독 심했고, 물만 마셔도 토악질을 하며 잠을 깰 만큼 밤새 앓았다. 그러고는 다음날 아침 내과병원 영업이 시작되자마자 달려가서 수액을 맞았던 기억이 있다.
그 뒤로는 식습관을 좀 고치려고 노력하기도 했고, 수험생활이 끝나고 다시 본가로 돌아가면서 장염을 앓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사회 초년생의 회사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회식과 음주, 스트레스로 인해서 다시 장염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 쯤되면 정말로 오래된 죽마고우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 시기의 나는 농담으로 '장염 다이어트'를 주기적으로 해야 살이 2~3 킬로그램 정도는 빠진다고 하고 다녔다. 그만큼 20대, 30대의 나에게는 장염이란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앞으로는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날이 찾아왔다.
2024년 2월의 마지막 주, 나는 연애 8년, 결혼 9년 차로 알고 지낸 지 17년 된 남편과 7살이 되어 봄 방학을 맞이한 딸과 함께 홍콩 여행을 갔다. 홍콩 여행 3일 차에 접어든 날, 홍콩의 도심 여행을 하기로 했다. 아침부터 하늘이 흐리고 일기예보를 보니 약한 비 소식도 있어, 날씨가 좀 쌀쌀할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그날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도보로 이동해서 여행을 해야 하는 날이었다. 나는 하루 종일 가지고 다닐 짐을 더 늘리기 싫어서, 한국에서부터 챙겨 온 긴팔 카디건은 호텔에 두고 반팔 티셔츠 한 장만을 입고 나가기로 했다. 호텔 밖을 나가서 페리를 타자마자 구름이 잔뜩 낀 흐린 하늘과 차디찬 바람을 맞으며 약간 후회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서 겉옷을 가져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벽화거리에서 사진도 찍고 에그타르트도 사 먹고 커다란 관람차도 타고 즐거운 관광을 했다. 저녁식사로는 백종원이 먹었다는 홍콩식 도시락을 포장해 가서 호텔에서 먹기로 했다. 늦은 오후가 되니 날이 점점 더 흐려져서 도시락 가게 아주머니도, 오늘 반팔 입기엔 너무 춥지 않냐며, 웃으며 날 걱정했다. 도시락을 포장해서 호텔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조금 몸살 기운이 느껴지며 으슬으슬 몸이 추워졌다. '얼른 호텔에 가서 따뜻한 방에서 든든하게 배를 채우면 괜찮겠지'하고 생각했다.
호텔에 들어와서 도시락을 먹으려고 상을 차리는데 점점 몸살 기운이 심해지는 것 같았다. 마침 한국에서부터 챙겨 온 핫팩을 하나 뜯어서 배에 올려놓고 몸을 따뜻하게 해 주며 저녁을 먹었다. 도시락은 정말 맛있었고 내 입맛에 딱 맞아서 몸살 기운에도 불구하고 엄지 손가락을 연신 치켜세우며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 그런데 컨디션이 좋지 않은 채로 과식을 해서 그런지, 잠들기 전 문득 너무나도 익숙한 장염 기운이 느껴졌다.
'앗, 내 친구가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가족여행 중에 남편과 아이를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다음 날은 홍콩 디즈니랜드를 가기로 한 날이었다. 메슥거림과 복통을 참고 핫팩에 의지해서 잠을 청해보았지만, 더부룩함은 가시지 않았다. 결국 다시 일어나 먹은 걸 모두 게워내고 나자 속이 좀 편안해지면서,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아이는 이미 잠들었었고 남편도 이내 내가 괜찮아졌음을 확인하고 안심하고 잠을 청했다. 다행히 다음날 아침에 꽤 컨디션이 괜찮아진 기분이었다. 아무 약도 먹지 않고 이렇게 자연적으로 치유된 장염은 처음인 것 같았다. 언제 아팠냐는 듯이 우리는 남은 홍콩 여행 일정을 잘 마무리했다.
그땐, 이 장염이 이렇게나 나와 우리 가족의 일상을 흔드는 병의 전조 증상일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