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 때는 말이야~
내 고향마을에는 초등학교 3학년 때를 전후로 전기가 들어왔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그럼, 전기 들어오기 전에는 호롱불 켜고 살았겠네?” 하고들 묻는데
사실 나는 호롱불을 켜고 살았는지, 촛불을 켜고 살았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기억에는 없지만 아마도 낮에는 동네 유기견처럼 뛰어놀다 해 떨어지면 지는 해와 함께 죽은 듯 자고, 다시 해와 함께 깨어나서 또 하루만 사는, 그런 삶을 살지 않았나 싶다.
뭐…. 어쨌든 나는 그런 시골에서, 그런 분위기에서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니 무슨 남달리 대단한 유년의 추억이 있었으며, 가족의 사랑 그 비슷한 기억이라도 있을 것이며, 또 그 어려웠던 수련장을 풀어가며 학업에 열중했던 기억이 있을까?
굳이 뭔가 억지로 기억해 보면 보리타작할 때쯤 감자 한 양푼이 삶아주면 그거 다문 한 개라도 많이 먹을 거라고 감자 양푼을 가랑이에 끼고 돌아앉아 먹었던 기억, 어린 고구마 한 소쿠리 삶아 놓으면 우리 집 4번이랑(네 번째 아이) 둘이 함께 저녁 먹고 돌아앉아 잠자기 전에 반드시 그 소쿠리까지 다 작살을 내 논 기억….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 봐도 먹을거리에 대한 욕심 외는 크게 욕심도 없었지 싶다. 밥 많이 먹고 숙제 따위는 조금만 할 궁리에 잔머리 굴린 게 유일하게 머리 쓰며 산 일이지 싶다.
그렇게 자란 나를 사랑받고 자란 막내로 기억해 주는 친구를 만났다.
옴마야~ 참 별일이긴 하지만 사실이다.
몇 년 전 아버지 장례식장에 고향 집,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가 와서는 찔찔 울고 있는 나를 다독거리면서
"필수야. 그래 맞다. 너 아버지는 너를 참 사랑하셨었다. 그자"
이런 소리를 해서 나오던 눈물이 도로 쏙 들어가게 하더니 어제 만난 내 고향 친구도 비슷한 말을 하는 걸 보면 내가 우리 집 사랑스러운 막내였던 건 맞긴 맞나 보다. 그런데 정작 그 사랑의 수혜자이어야 하는 나는 그런 사랑(?) 비슷한 걸 받아본 기억이 없으니 혹시 내가 열 몇 살쯤에 기억상실증에 걸린 게 아닐까?
어쨌든 그런 기억이 내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 집 사랑스러운 막내였고 울 엄마는 극성스럽게 학부모 모임에 드나들었고, 친구들은 우리 엄마랑 아버지를 소풍 때 떡 함지박깨나 돌린 극성 학부모로 기억하니 그야말로 내가 우리 동네 금수저였던 건 확실하다.
나이가 드니 동창들을 만날 일이 가끔 생긴다.
특히나 우리 학교는 아주 시골에 있어 한 학년에 서른 명 남짓 같이 입학해 졸업할 때까지 같이 지냈다. 그러니 언제 키가 컸는지, 가슴은 언제 나왔는지 누가 꼴등을 도맡아 했는지 너무도 빤한 사이들이다.
어른이 되고 나서 초등학교 친구들과 모임 비슷한 걸 일 년에 두세 번 한다. 그럴 때 내 금수저 시절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지금 내 사는 모양은 금수저는커녕 나무 숟가락도 겨우 들고 사는데 영 민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릴 적 부모님의 부(?)뿐 아니라 그 부와 결탁한 선생님들의 편애(?)까지 받고도 겨우 이러고 살다니 참말로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래도 엄마 아버지한테 특별한 무엇을 받은 기억이 없다고 생각할 때보다는 내가 울 엄마 아버지한테 나는 이쁨 듬뿍 받았던 딸이었구나 싶으니, 가슴이 따뜻하고 행복해져 집으로 돌아올 때 괜히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하기도 한다. 우리 아버지께서 주신 그 사랑의 실체를 아직 발견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참 다행이다.
내가 사랑받고 자란 유년을 가진 사람이라서….
오십이 넘은 나도 부모님의 사랑(?)이 이렇게 힘이 되는데 아이들은 오죽할까? 한창 성장할 때야 말할 것도 없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님의 사랑은 큰 자산이 된다.
내 아이들 또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다 내 사랑이 뒤에 있음이 보이는 순간 울 엄마 아버지로 인해 내가 느끼는 이 든든함 비슷한 느낌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맘을 품게 된다.
1970년대 수곡에서 치맛바람깨나(?) 날려주신 문여사와 돈주머니를(?) 풀어주신 기경씨를 생각하면 요새는 자꾸 웃음이 난다.
비록 지금 내 삶이 고단하더라도 나도 수곡에서는 금수저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