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치는 빨강
여름이면 지천으로 흐드러진 초록을 보며 생각한다. 색 앞에 수식어를 하나씩 붙여 보면 어떨까. 자연의 색은 스스로 그러하여 이름이나 수사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인간은 굳이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사물이나 풍경이 재생되어 만들어지거나 그려지거나 쓰이길 원할 일 없지만 조각가들과 화가들, 시인들은 오래도록 이어 온 그들의 작업을 그만 둘 의사가 없다.
진격의 초록, 사무치는 빨강, 아릿한 보라, 알싸한 주홍, 아련한 살구, 알쏭달쏭 노랑, 사뿐사뿐 분홍, 뚜벅뚜벅 잿빛, 소슬한 파랑, 그리운 연두, 의뭉스러운 하양, 단호한 검정....,
왜 이런 수식어를 붙이는지 설명하는 일은 재미없다. 이 건 놀이 이기 때문에. 물때 없이 떠오는 단어를 붙잡아 데려다 놓는 장난이다. 이 낚시 놀이에도 찌와 미끼가 필요하다. 놀이를 조금 길게 하다 보면 이 놀이의 주 재료인 내 인식의 범위와 표현력의 한계로 금세 놀이가 끝나버려 움직이지 않는 찌로 심심해진다.
심심함은 창작의 벗이니, 그럴듯하지 못한 밑천이 드러나는 순간 다시 창밖을 보며 색을 찾는다. 내가 보지 못한 색은 어떤 걸까. 봤지만 인식하지 못한 색은? 인식하였으나 수식하지 못하는 색은?
오늘도 비가 쏟아지는 구멍 뚫린 하늘과 물 웅덩이로 질퍽한 땅 사이 가득한 비(Rain) 색깔 공기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궁리한다. 이 놀이에 시간이 빗물처럼 흘러간다. 시간이 장대비처럼 흘렀어도 아직 찾지 못한 수식어를 뗀 그냥 비 색깔 공기에서 가을 냄새가 난다. 이제 여기는 그만 속절없는 비가 그쳐주었으면 좋겠다. 초록이 진격을 멈추고 사무치는 빨강으로 물들려는 잎들에게 다음 계절을 내어주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