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마음

by 하루

비 오는 날 갑자기 허기진 마음에 항아리 수제비를 먹으며 이 쫄깃한 식감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생각한다. 입 속으로 들어온 수제비는 정성을 다해 여러 번 치댄 반죽이었을 테다. 그러다 문득 잘 치댄 밀가루 반죽이 뜨거운 국물 속 수제비로 익고 나면 다시 반죽으로 돌아가지 못하는구나, 물과 함께 뭉쳐진 반죽은 다시 밀가루가 되지 못하는구나 하는 별 신기하지 않은 생각을 한다. 푹 퍼진 죽이 되고 나면 다시 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밥은 다시 쌀로 돌아가지 못한다. 수분과 열이 가해져 성질이 변하는 지점을 지나게 되면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때 가해진 불과 물은 의도한 변형에 필요한 화학작용이어서 그 결과가 긍정적이다. 비 오는 날 수제비는 영혼의 음식이 될 수도, 탈이 난 뱃속에 흰 죽 한 그릇은 치유의 음식이 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때로 어떤 원인으로 변곡점을 지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태가 마치 식기 세척기에 들어가 심하게 뒤틀린 플라스틱 그릇 같을 때가 있다. 의도된 것은 아니었지만 실수 또는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그저 많은 시간이 흘러, 사소한 다툼으로, 오래된 질투로, 회복할 수 없는 상실로. 이런 불온한 물과 불은 홍수와 화재처럼 삶에 크고 작은 뒤틀림과 상처를 남기고 내 원래의 모습을, 관계의 처음 모습을 훼손한다. 처음 변곡의 시작은 외부의 영향이기 쉬우나 변곡을 지난 원형 이탈의 훼손은 내부에서 심화되고 가속화되는 경향이 있다.


유리처럼 단번에 깨진 마음은 그 파편들을 다시 끌어 모아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다. 비록 이어 붙인 자국과 깨져 바스러진 부분이 아프고 허전하지만 금 간 선들과 빠진 구멍들은 명확히 드러나 어떻게 깨지고 얼마나 잃어버렸는지 그 과정을 복기할 수 있어 인정하고 받아들일 엄두를 낸다.


일그러진 플라스틱 마음은 유리보다 어려워 어느 경계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원래의 모습이 어땠는지 가늠하는 일이 쉽지 않을뿐더러 흉하게 일그러진 모습을 마주 대하는 것이 두렵다. 두렵지만 더 일그러지지 않기 위해 해야 하는 일, 그 대면에 용기가 필요하다. 외부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 뜨거운 세척기 속 플라스틱처럼 일그러진 마음을 마주할 결심. 그 건 나이가 든다고 경험이 쌓인다고 책을 많이 읽어 쉬워지지 않는다. 결코 능숙해지거나 익숙해지지 않는 일도 있다.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고대하는 중에도 그 변덕스러운 행운에만 기대지 말 것. 늘 내 귀에 온도계를 꽂고 내 마음속 이야기를, 시간을 내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을 수 있기를. 나와 타인에게 귀 기울인 시간의 친절함으로 식기세척기에 들어가려는 플라스틱 마음(물에도 불에도 끄떡없는 스테인리스 스틸 마음은 언감생심 터미네이터)을 멈춰 세울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람이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은 마주한 사람에게 기울어지는 그 사람의 시간.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그 가장 귀한 선물을 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마음은 세심한 친절함, 귀한 선물조차 막을 수 없는 도저하고 맹렬한 시간의 풍랑과 온난화로 어쩔 수 없이 일그러지리란 걸 안다. 그때는 막무가내 시간에게 선선히 빗장을 풀고 플라스틱처럼 말고 수제비처럼 흰 죽처럼 담백하고 말갛게 뭉근히 일그러지는 마음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갑자기 던져져 유리처럼 단번에 깨지는 것도 흉터가 심하게 남는 몹시 아픈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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