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이름

다 가지 않은, 미처 다 못 온

by 하루

늦은 저녁 방 창문을 여니 제법 선득한 바람이 분다. 여름밤 치열하게 울어 대던 매미들도 때를 알아 모두 떠났다. 낡은 단지 정원에 아파트만큼이나 오래된 아름드리나무들은 서걱서걱 바람 소리를 내며 하늘을 뚫을 듯 아직 거기 서 있다. 사계절이 들고 나는 사건을 하루도 빠짐없이 충실히 목격한 나무들에게 물어볼까? 이 계절의 이름이 뭐니? 진즉 다 가지 않은 여름과 미처 다 못 온 가을 사이의 시간. 그냥 ‘환절기’라고 평평하게 부르기엔 뭔가 이 시간의 진 면목에 닿지 못해 딱하다. 이 계절을 제대로 담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시적인 이름이 있지 않겠냐고. ‘개와 늑대의 시간’ 같이 멋들어진 이름으로 불리기에 마땅한 하나의 엄연한 계절이니. 시인들의 시어를 빌어 ‘풀이 눕는 시간’이랄지, ‘무화과가 익어가는 계절’이랄지……여기까지다. 상상이 빈곤한 내 한계다. 나무들도 서늘한 바람소리만 들려줄 뿐 말이 없다.


내 삶을 계절로 치자면 지금이 다 가지 않은 여름, 미처 다 못 온 가을이다. 여름 뜨거운 태양과 가을 타오르는 단풍이 한꺼번에 애틋하게 그리운 계절. 빛나는 태양이 마땅히 그 열매를 바라고 여름을 보내 주었건만 야물게 여무는 기색 없이 신통찮은 열매들만 매달고 있을까 단풍이 오기 전 초조하다. 이 계절 세리에게 쫓기는 농부가 된 양 가을을 걱정하며 인사도 없이 서둘러 가버린 애먼 여름에게 화를 낸다.


여름의 열기 속에 드문드문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저녁, 창문을 열고 고요히 나무를 본다. 나무를 빌려 바람이 내는 소리를 한참 듣고 서 있다 마음에도 바람이 들어 소슬해지면 창을 닫는다. 문득 알겠다. 성을 낸다고 가지 않을 여름이 아닌 걸, 시치미 뗀다고 오지 않을 가을이 아닌걸. 이 계절의 이름이야 어찌 되었든 찬란한 태양과 오색의 단풍이 함께 공존하는 짧디 짧은 찰나인 것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계절인 것을 문득 알겠다. 불쑥 화를 내며 세리 걱정으로 보내기엔 참 아까운 시간이란 걸 하룻 밤새 또 잊지 않게 해 달라고. 백 년 만에 뜨는 '쟁반 같이 둥근달'에게 소원을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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