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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섭코 May 10. 2020

<1> 그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다는 장벽


 


덴마크에 처음 도착해 일상생활을 시작하려고 했을 , 내게 가장  장벽은 언어도 문화도 아닌 선택의 장벽이었다. 선택지가 부재하거나 턱없이 부족한 상황들, 그때의 감정들은 내가 행복의 나라에서 발견한 첫번째 불행이었다. 필요한 물건을 구매할 때부터, 세탁기를 돌릴 때같은 일상적인 모든 상황들에서 선택의 장벽이 버티고 있었다. n년간 살면서 잔뜩 쌓여있던  머릿속 데이터베이스는 이곳에서 무용지물이었다.

 사고싶은 게 있을때 어디를 가야 하는지, 원하는 옵션이 포함된 상품은 어떤 것인지와 같이 아주 기본적이고 익숙한 선택 상황에서 바보가  기분이었다. 이런 선택의 장벽들이 그렇게도 우울하고 불행했던 이유는, 내가 손꼽는 행복의 방법  하나가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선택지들  내가 선택해본 , 선택하고 싶지 않은 , 새로 선택해보고 싶은 것들을 솎아내 결정하는  과정을 좋아해 왔다.  과정들은 때로는 자기표현이기도 했고,  취향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했고, 본능적인 욕망을 채우는 일이기도 했다. 내게 선택은 행복을 느끼는 방법  하나였다.


 하지만  곳에서는, 선택지들을 솎아내기는 커녕 선택지가 부재한 상황들과  자주 마주하게  것이다. 원하는 목표에 제일 근접한 선택지를 하나라도 발견하면 그것만으로 감지덕지. 허둥지둥 선택하고 있었다. 샴푸를  , 이게 비듬샴푼지 극손상모용인지 모르겠지만 Shampoo 라고 쓰여있으니 그냥 사는 그런 선택들. '이거겠지?' 하는 도박같은, 혹은 '이것뿐이네' 하는 어쩔  없는 선택들이 거듭되는 날들이  우울했다. 더군다나 덴마크는, 여행지로서도 해외생활로서도 정보가 없는 편에 속하니 구글신도 나를 도와주지 못했다.


1월말경 덴마크에 입국할때의 비행기 창문 밖 풍경. 덴마크의 겨울은 대체로 이렇게 구름이 자욱하고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낯선 곳에서 생활을 해나가기 위한 데이터를 바닥부터 쌓기 위해서는 이제껏 살아오며 쌓아온 직관(과 구글 번역기)을 백분 활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들이 여행중에 있었더라면 모험처럼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이 곳에서 앞으로 살아가야 했던 내게는 불안하고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당연히 시간이 지나면 데이터가 쌓이고, 내 선호도 찾을 것이고, 비로소 이곳에서의 선택들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덴마크만의 매력이 넘치는 선택지들도 등장할 것이고,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선택지들을 발견하면 더 큰 행복도 느낄 수 있을 거다. 그 미래의 행복을 위한 현실의 돌파구는, 복불복같은 선택일지라도 계속 데이터를 쌓아가는 것뿐이다. 지금 당장 불안하고 답답하더라도.

 쓴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효과 없는 헤어에센스를 사고, 얼음을 네다섯 개만 넣어 미적지근 아메리카노에 실소가 나오고, 세탁기에서 꺼낸 니트가 잔뜩 줄어있더라도 주욱 밀고 나가며 해야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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