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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an Lee Oct 04. 2016

퇴사 : 뜻밖의 비행

처녀비행 이야기



퇴사 : 뜻밖의 비행

그 토요일은 세상 별 일 없는 화창하고 맑은 주말이었다. 지금 쓰고 있는 문장처럼 지극히 평범한 그런 날. 다른 게 있었다면 전 날 오래전에 잡힌 선약이 있어 새벽에 귀가를 한 것 정도. 그것도 금요일이라고 한다면 으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직장인에게 주말의 늦잠은 영혼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권리이기에, 나는 스스로 눈이 떠질 때까지 하루의 시작을 미루고 미루다 열한 시쯤 비비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대폰 시계는 11시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렸다. 그래서 화장실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는데,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사실 ‘썩 좋지 않았다.’라는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처참한 기분이었다. 약속도 없어 하루 종일 원하는 만큼 집에서 뒹굴 거리면 그만인 날인데도 일어나자마자 기분이 너무나 좋지 않았다. 월요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주말에도 편히 쉴 수 없는 그 단 한 가지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뻔했다. 월요일.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오는 월요일. 그리고 월요일에 있을 회의와 압박. 이윽고 또 다른 원인의 불쾌감이 이어졌다. 그것은 주말인데 일어나자마자 기분 나쁜 것이 떠올랐다는 나 스스로에 대한 불쾌감이었다. 변기에 앉아 머리채를 잡고 흔들며 이 기분이 가시기만을 빌었다. 살려주세요.라고도 했던 것 같다. 시트콤의 한 장면 같은 그 삽질을 끝내고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검색을 했다.



‘oo구 신경정신과’



내게 병원을 찾는 건 그리 큰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 몇 년 전 같은 소재 확연히 다른 이유로 병원을 방문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땐 그 일이 정말 큰 인생의 시련인 것처럼 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병원을 간 건 좀 오버였던 것 같다. 어쨌든 다시 찾은 병원은 그 간의 정신건강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이 바뀐 것을 보여주는 듯, 대기하는 내내 꽤 많은 이들이 오고 갔다. 서로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여러 번 스치기도 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르고, 나는 원장실로 들어가 앉았다.



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신경정신과도 다른 병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듯 내원자를 위해서 온통 흰 벽으로 인테리어에 신경을 썼다든지, 등을 기댈 수 있는 안락한 의자를 마련했다든지. 그런 건 없다. 책과 연구자료, 옆으로 치워져 있는 내 앞 순서 내원자들의 차트 등등, 그들의 일상 속에서 나의 아픔을 구체적으로 털어놓으려고 숨을 들이쉬고 주변을 바라보면, 조금은 그 억울하고 격한 감정이 무뎌지기도 한다.



앞에서 내 말을 듣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선생님을 향해 토요일 아침인데 기분이 너무 안 좋아서 오게 되었다는 말로 내 증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그즈음 나는 업무에 대한 압박과 더불어, 업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특수하다면 특수한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기에, 이 업이 나와 맞는지에 대한 고민을 6개월 넘게 하고 있었다. 사실 이미 퇴사는 언제든 하리라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져 내 팔을 잡고 흔들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만화적으로 표현하자면 머리 왼쪽에선 천사가 고작 2년 반밖에 되지 않았다며 좀 더 버텨야지 않겠냐며 날고 있고, 오른쪽에서는 그래 너 때가 되었어. 얼른 준비하란 말이야.라고 제가 들고 있는 삼지창으로 내 머리를 찌르는 악마가 날고 있다. 입사 때부터 언제까지 다니나 보자 라던지, 너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날 잘 아는 지인들은 어떻게든 성공한 나의 취업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 가운데서 꿋꿋하게 여기서 그래도 다닐 수 있을 거라고 믿었고, 정말 한동안은 그렇게 성실한 직장인 코스프레를 하며 살았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원래 직장 생활은 쉽지 않다만 정말 그랬다. 다만 나는 사람과의 관계에는 능했다. 멤버가 몇 되지 않는 사무실에서 막내를 하고 있었기에 어차피 대부분 깍듯하게 잘 하면 되는 것이었고, 아래에서 보는 직급 간의 갈등을 제삼자의 시선에서 그저 관찰을 하거나, 내게 가끔 물어오듯 요청하는 동조에 그냥 말없이 웃고만 있으면 어려울 건 없었다. 원래 성격을 드러낼 일도 없었고, 사원이 발톱을 드러내기엔 시기상조인 회사의 분위기도 있었다. 그 분위기를 맞추면서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지만, 문제는 일 그 자체였다. 본디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성향과는 지독하게 맞지 않았다. 하고 있는 일이 보잘것 없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은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하는 사람들은 저렇게나 잘하는데, 나는 내가 보기엔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러한 상황에도 목표나 타개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성과가 하루하루 확연히 드러나는 상황에서 나는 압박을 받으면서도 제 몫은커녕 피할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대학을 다니며 그렇게나 싫어하던, 프리라이더가 되고 있었다.



게다가 퇴사 시기를 6개월 내내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사무실의 멤버는 자꾸 바뀌었다. 회사의 그 어느 팀보다도 우리 팀의 환경은 휘몰아치듯 하루하루 바뀌었다. 말도 되지 않는 최소의 인원으로 팀이 움직였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전근은 선입선출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퇴사 시기는 점점 미궁에 빠졌다. 새로 오신 팀장님의 욕심으로 인한 압박까지 더해져 나의 회사생활은 그로기 상태가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덩어리가 되어 나의 토요일 아침을 망친 것이다.



“나라도, 내 편을 들어야죠.”



생각이 너무 많네요. 나의 모든 이야기를 쏟아내고 나서 의사가 한 말에, 나는 왈칵 울어버렸다. 꽤 긴 시간 다른 사람 혹은 바깥 상황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오고 있었다는 말로 진단을 시작하며, 간단하게 초기 우울증 증상이니 일주일 간 약을 먹은 후 지켜보자고 말했고, 약을 들고 집에 와서 다시금 잠을 청했다. 그 후 약을 먹는 동안 이따금씩 따라오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힘들었던 건 나 스스로에 대한 몰인정이었다. 나라도 내 편을 들어야 한다는 말을 따르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따르고 싶지 않았다. 내 편을 들어버리면 나는 이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는 낙오자가 될 것 같았다. 모두의 기대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약을 먹으면서도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은 여전히 나는 이 회사에서 버티고, 잘 해 낼 수 있다는 자존심이었다. 꾸준히 이 상태에서 산다면 어느 정도의 먹고 사니즘은 보장되니까, 부모님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고, 포기하기엔 이르다는 생각이 그때는 들었다.



그러나 일주일 후 약을 다 먹고 나자, 버티고 난 후의 나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요즘 말로 의사 선생님의 매직이었다. 드디어 내가 내편을 들기 시작한 거다. 버티고 나면 뭐가 남는가. 얼마 남지 않은 명예퇴직, 젊을 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추억 혹은 회한. 등등. 그것보다 더 큰 내 발목을 잡은 건 어이없게도 한 가지였다. 하고 싶은 건 해야만 하는 성격. 하고 싶은 게 있는데도 일단 취업을 선택한 건 3년 전의 나였다.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시류에 밀렸고 열심히 하지 않을 것이 두려워 취업을 하고자 2년여를 고생했다. 마지막까지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취업문이 겨우 열려 손잡이를 잡고 민 것이 이곳이었지만, 결국 나는 문을 열고도 입구에서 얼마 가지 못한 채로 머물러 있었던 거다. 약이 한 봉지도 남지 않은 날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인생 최초의 비행을 허락받기 위해 본가로 내려갔다.



부모님의 반응은 생각보다 온화했다. 역시나 이럴 줄 알았다는 분위기셨다. 내심 실망을 하셨을 거라 생각했지만, 20년을 넘게 같이 산 나의 성격을 다행히도 잘 알고 계셨기에 지지한다는 뜻을 내비치셨다. 그것에 또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어 한참을 울었다. 나 자신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 모두가 왜냐고 묻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그 정도로 내가 맞지 않은 일을 하고 있었나 싶어 헛웃음까지 났다. 회사에서는 대단하단 말로 나의 용기를 평가했다. 그것은 지옥 같은 회사 바깥공기에 대비되는 나의 무모함이 돋보였기 때문이었으리라.



아직도 인상적인 건 나오는 날까지 자비 없는 업무환경은 내일도 나와서 일을 해야 할 것처럼 나에게 새로운 업무들을 던져주었다. 세시쯤 되면 회사의 아는 분들과 통화를 하며 인사를 해야지, 네 시에는 짐을 싸고, 다섯 시 에는 채 다 못했던 인수인계를 위해 보조 파일을 만들어둬야지 와 같은 야무진 퇴사일의 계획은 단 하나도 지켜지지 못했다. 셧 오프 10분 전에 대충 손으로 휘갈긴 편지로 인수인계를 대신했고, 5분 전에 짐을 쌌으며, 퇴사 다음 날 피신하듯 날아간 일본에서 되려 엄청난 연락을 받으며 퇴직인사를 대신해야 했다. 그렇게 회사를 나왔다.



퇴사 후 한 달이 지난 지금, 나의 비행 성년기 생활은 생각 외로 잘 흘러가고 있다. 다녀온 여행을 생각하며 다녀올 여행을 상상한다. 일주일에 한 번 도서관에 가서 어르신 분들이 계신 신문 열람대에 나란히 앉아 나라 걱정을 하고, 이틀에 한 번 꼴로 영어학원에 가서 잊어버렸던 단어들을 다시 머리에 심는다. 그런가 하면 대낮에 헬스장에 가 남의 시선 의식 않는 수행 같은 운동을 한다. 그중 제일 즐거운 건 공무원 시험 결과 발표 대기 중인 친구와 서로의 스케줄을 공유하며 밤이슬로 인한 다음날 후유증 따위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의 불안감을 즐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원활한 직장생활 중인 지인들이 어떠냐고 물으면 활짝 웃으며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난 마음을 담아 말한다. 그만두지 말라고.



반년을 넘게 고민한 결과물이 퇴사인 건 아직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아직 채 다 떨쳐내지 못한 죄책감과 이후의 삶이 계획한 대로 진행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퇴사 후 생활이 가끔은 미치도록 즐거우면서도 가슴 한편에 버려지지 않는 그 마음들은 어릴 적 학원에서 공부 대신 오락실을 드나들던 때를 생각나게 한다. 내가 벌인 퇴사라는 행위가 비행이라는 범주에 속할 수 있는 건 아마도 내가 ‘그쯤이면 직장생활은 하고 있어야지’라는 사회가 주는 의무감을 저버린 탓일 것이다. 나와 나의 주변의 삶을 지배하는 그 지긋지긋한 의식 속에서 자유로워지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안정감의 무게가 크다는 것도 알기에 어쩌면 나에게 퇴사는 끝날 때까지 비행 혹은 guilty pleasure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처녀비행이 두렵지 않은 것은, 내가 나 자신을 믿어서도 아닌, 모아둔 돈으로 얼마간은 살 수 있다는 경제적 여유 덕분도 아니다. 적어도 이 비행이 끝나면, 아주 오랫동안 이 비행으로 말미암은 추억과 에너지로 다음 순간들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웃고, 걷고, 보고, 느끼고 있는 이 시간들이 나에게는 몇 곱절 긴 인생을 사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 길고 지루한 공부를 하게 될 수도 있고, 다시 조직의 일원으로 기계의 부품처럼 살아갈 수도 있다. 혹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쪽으로 인생이 흘러가게 될 수도 있고. 하지만 어느 순간을 맞닥뜨리건 간에, 내일을 걱정하며 오늘을 놓치는 실수는 하지 않을 수 있을 거다. 지금 이 순간의 나는 어제 내가 한 걱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나라는 것을 깨닫는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인생 뭐 있나. 월세 아니면 전세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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