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보호자가 되었다

새로운 세상이 시작됐다

by 수빈노

나는 딸 둘 가진 집 막내다.

흔히들 그렇듯 서른이 넘어서도 여전히 '아가'로 불리고, 밖에서 무얼 할까 노심초사 심지어는 '돌아오는 버스는 건너서 타야 해'라는 당혹스러운 당부를 최근까지 듣던 막내딸이 나였다. 아빠는 이유불문 언제나 '우리 예쁜 아가'로 나를 아껴주었고, 엄마는 곱디곱게 키울 테니 평생 그렇게 곱게 살아가라 했으며, 언니는 늘 뒤에서 나를 한번 더 지켰다. 그 어떤 순간에도,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든 간에 이 집안에서만큼은 가장 여리게 보호받는 존재였다.


나날이 더해가는, 도통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에 몇 달째 시달리던 엄마에게 병원을 다녀왔는지, 왜 한참을 다녀도 나아지지를 않는지, 새로운 병원에서도 원인은 모르겠지만 별일 아닐 것이니 걱정 말고 약을 먹어보라고 침을 맞아보라고 왜 다들 그런 답답한 소리만 하는지 애꿎은 짜증을 내던 나날을 지나 찾은 상급병원. 대한민국 일등이라는 그 병원의 한 달 따윈 거뜬히 넘는 예약 날짜가 드디어 다가왔고, 이런저런 검사를 받았고, 결국 직접 엄마 손을 붙들고 진료실에 들어섰다.


"엄마, 분명 이 선생님도 또 이유를 모르겠다고 할 테니 그렇게 내쫓듯이 처방전 들려주고 말 테니까 너무너무 아프다고 해. 너무 아파 죽을 지경이니 모르겠다 하지 말고 어떻게 뭐라도 좀 해달라고 할 참이니까."


어라. 어쩐지 오늘은 아프다는 하소연 비슷한 우리 이야기를 한참 잘 들어주신다. 지금까지 만났던 무신경한 의사들의 표정과는 달라서, 심지어는 어쩐지 그 아픔을 이해한다는 듯 측은함이 묻은 그 표정과 말투에 무장해제된 나는 드디어 우리 편을 만난 마냥 반가움까지 느끼며 술술 엄마의 통증을 나열하고 설명했다. 어디가 어떻게 아파요. 저기도 이렇게나 아파요. 잠도 못 자요. 밥도 못 먹어요. 너무너무 아파해요. 그런데 왜 다들 원인을 모르겠다고 하는지 답답해 죽겠어요. 정말 아파요. 너무 아파해요. 어떻게 해야 해요 도대체.



“많이 안 좋아 보이세요.”

폐암으로 보여요. 여기 여기 여기 여기 이렇게 퍼져있는 것으로 보여요. 블라블라 블라블라 블라블라블라블라 블라블라 블라 블라...


?

세상이 멈췄다. 세상이 무너졌다. 세상이 멀어졌다.

글쎄... 모르겠다. 현실과 아득하게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어마 무시한 태풍이 피할 틈도 없이 덮쳐버린 것도 같고, 어디 높은 데서 등 떠밀려 저 깊이 모를 지하세계로 빨려가듯 떨어진 것 같기도 했다. 어떤 말로 표현하면 좋을지 참 모르겠는데 나는 더 이상의 이성적인 판단과 감정 조절이 불가능했던 것 같다. 그 순간 이후 잘 기억이 나지도 않으니 옮길 수도 없다. 실은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침착하고 냉담한, 아니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인 줄로 알았던 나는 진료실을 떠나며 이미 얼룩진 감정들로 온통 범벅되어 있었다. 이것은 슬픔도 당황도 분노 괴로움 절망 그 무엇도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그 어떤 단어 속에 담길 만한 감정이 아니었다. 진료실 앞, 딸과 나란히 앉은 엄마는 '인생 참... 모르겠다.'라고 말했고, 초점 잃은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말 없는 우리 사이에서 자꾸 꺼억꺼억 소리가 났다. 엄마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가만히 손만 꼭 잡았다. 아닐 거야. 엄마, 아닐 거야. 그렇게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한 채 몇 시간이 흘렀다.


"언니랑 아빠한테는 일단 말하지 말자. 밥이라도 편히 먹이고 말하자." 라더니 밥을 먹고는 내일 말하자. 주말에 말하자. 확진을 받고 말하자. 자꾸 미루는 엄마가 내 앞에 있었고 나는 마음이 약해졌다. 인정하기 싫었다. 말하고 나면, 모두가 함께 알아버리고 나면 정말 인정하게 되는 것 같았다. "엄마, 일단 오늘은 너무 힘들었으니 쉬어. 쉬고 내일 나랑 다시 생각해." 엄마를 재우고 방으로 들어왔다. 가족들 앞에서는 웃고 장난치고 밥도 꾸역 먹더니만 엄마를 뒤로 하고 혼자가 되자마자 눈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의사의 마지막 그 한마디에 기대어 밤새 그 병을 검색했다. 마구 찾고 읽고 보고 생각했다. 증상. 병기. 치료. 예후. 여명. 생경한 언어들로 가득한 세상이었다. 생전 관심도 없던 이런 세상이 엄청난 규모와 깊이로 펼쳐져 있었다. 아닐 거라고 되뇌면서도 끊임없이 눈물이 났다. 나는 두려웠다. "그게 아닐 가능성은요? 그 판독이 오류일 가능성은요?" 너무 묻고 싶었지만 끝내 묻지 못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아니 왜 이런 생각은 단 한 번도 못해봤을까. 엄마가 이렇게나 아픈데 왜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건지 대체 왜 아무도 원인을 못 찾는 건지 답답해만 했을까. 그 흔하디 흔하다는 암이라는 병마에 대해 단 한 톨도 모르는 무지한 내가, 몇 달을 아파하던 엄마가 내일은 좀 나아지겠지 지켜보기나 하던 무심한 내가 갑갑하고 원망스러워 목구멍 저 깊은 곳이 터질듯한 심정을 어찌 설명할까.


그렇게 나는 보호자가 되었다. 새로운 세상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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